청소년인권친화적인 콘텐츠 발굴하기 ① 이알의 <고등래퍼>, <에이틴> 리뷰 - 우리에게 청소년인권친화적인 콘텐츠가 필요한 이유: 고등래퍼와 에이틴 속 청소년

2019. 5. 14. 21:23특별 연재/청소년인권친화적인 콘텐츠 발굴하기

청소년인권친화적인 콘텐츠 발굴하기 ①


이알의 <고등래퍼>, <에이틴> 리뷰 - 우리에게 청소년인권친화적인 콘텐츠가 필요한 이유: 고등래퍼와 에이틴 속 청소년




에이틴은 에피소드당 10분 정도 길이의 웹드라마이며, 주된 내용으로는 18살 청소년들의 사랑과 연애,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너의 순간순간은 하나같이 예뻤다.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예뻤다.”


이 대사는 에이틴에 나왔던 대사다. 에이틴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드라마의 대사 나 연출이 너무 오글거린다는 것이다. 이 오글거린다는 느낌은 청소년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에이틴 속 청소년들은 다들 잘 웃고 활발하고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논다. 고민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무게가 비청소년만큼 무겁지는 않다. 풋풋하고 활발한, 마치 장밋빛 같은 인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청소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떻게든 청소년을 상큼 발랄하게 연출하려 하고, 특히 청소년의 연애와 사랑에 대해서는 위에 있는 대사처럼 과도한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드라마의 전체적인 내용이 오글거려졌다고 생각한다. 에이틴은 나의 학교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학교에서 나는 항상 책상에 늘어져 있으면서 별로 웃지도 않고 친구도 없어서 항상 시험이 끝나도 할 게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에이틴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에이틴은 나 같은 청소년의 삶을 전혀 대변하지 못했고 오히려 청소년에 대한 환상을 강요하고 그것이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 같았다.

에이틴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을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으로는 고등래퍼가 있다. 고등래퍼는 청소년 래퍼들이 모여서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나는 고등래퍼가 에이틴 보다 더 많은 청소년의 삶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에이틴은 비청소년 제작자의 기획으로 비청소년 배우들과 함께 만든 ‘겉으로만 청소년 드라마’였지만, 고등래퍼는 적어도 실제 청소년들이 프로그램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고등래퍼에 나온 청소년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노래에 담고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 위에 섰다. 이들은 대본에 의해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이미지로 가두어지지 않았다. 권영훈과 최진호가 부른 갈매기의 꿈에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현재의 우리도 멋있는 모습”이나 이영지와 송민지가 부른 오렌지 나무에서 “왜 내가 책을 펴고 철이 들어야 합니까” 와 같은 가사에서는 ‘청소년은 어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었다. 고등래퍼에서 에이틴에서는 볼 수 없던 청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래퍼는 아쉬움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고등래퍼에 나오는 청소년들은 무대에서 틀에 박혀있지 않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연출과 기획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표적으로는 고등래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청소년=학생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참여자들은 처음 모였을 때 나이에 따라 예비고1, 고1, 고2, 고3으로 나뉘었고 사용했던 의자와 책상도 학교에서 쓸법한 것들이었다. 이후 학년별 싸이퍼를 진행하며, 교과서에 있는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랩을 하는 등 학교를 기본으로 한 기존의 틀에 박힌 기획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등래퍼에서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등 앞에서 말했듯이 기존 학교의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 대다수의 청소년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이들의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해서 청소년이 등장하는 콘텐츠에 학교를 자주 등장시키지만 이는 에이틴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은 학교에 다니는 존재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시켜버린다. 더 나아가 학교가 나오고 등장인물이 교복을 입고 있으면 그 콘텐츠의 내용이 어떻든 청소년 콘텐츠로 분류되는 것도 청소년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에이틴과 고등래퍼, 두 콘텐츠의 제작자들은 청소년의 삶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청소년의 삶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통해 청소년에 대한 환상을 표현한 것이 에이틴이라면 고등래퍼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청소년들을 하나의 틀로 집어넣었다. 청소년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싶고 원하는 것만 콘텐츠로 만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위선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한편, 청소년에 대한 무지는 이 사회에서 청소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청소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에서 청소년을 대변할 수 있는 콘텐츠가 적거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청소년과 관련된 콘텐츠에서 지금보다 조금 더 다양한 청소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미디어 속 청소년은 그저 청소년에 대한 환상을 강화하고 청소년을 하나의 이미지로 가둬두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청소년들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청소년 인권 친화적인 콘텐츠를 찾아야 한다.


- 이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