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혜, 애너벨,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 <얼음 붕대 스타킹>,<그냥, 들어봐> 리뷰

2018. 5. 7. 22:45리뷰 ver.청소년


선혜, 애나벨,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 <얼음 붕대 스타킹>,<그냥, 들어봐> 리뷰




(책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5월 3일 서울시 북부교육지원청 정문 앞에서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스쿨미투‘는 노원 용화여고에서 학내 교사 성폭력 공론화를 위해 유리창에 ‘위드유(#Withyou)’, ‘We can do anything(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를 붙인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공론화 이후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노원, 도봉 지역의 중고등학교에서 학내 성폭력 고발이 이어졌다. 이런 고발이 이어지기 전까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침묵을 지키기를 강요받고 있었던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여기서 소개할 두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냥, 들어봐>와 <얼음 붕대 스타킹>의 주인공은 여성청소년이며, 주인공들이 자신의 남자친구, 누군지 모를 중년 남성들에게 성폭력을 당할 뻔한 상황을 겪은 뒤의 이야기이다. 애너벨과 선혜는 자신과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자신을 창녀라고 부르는 걸 들으면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가며 퍼지는 걸 들으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아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 여자랑 다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자가 없어서 아쉬운 남자가 아니라고,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했겠냐?”

“그 남자가 그런 짓을 안 했는데, 걔가 경찰서에 신고를 했단 말이야?”

“관심을 끌어보려고 그런 건지도 모르지.”

<그냥, 들어봐> 496p, 497p.

선혜는 얼굴과 배를 얻어맞고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사건은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한 여자애가 있더라는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엉뚱한 사람이 피해자로 지목되기도 하며 가십거리로 소비된다. 애너벨이 친구 소피의 남자친구인 윌 캐시에게 당한 일은 친구를 질투해서 친구 남자친구를 섹스하자고 꼬시려 했던거라고 왜곡되어 퍼진다. 하지만 윌 캐쉬는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기까지 했는데도 ‘그런 짓을 할 만한 남자가 아니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2017년 국가인권위(인권위)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한 ‘초중고 교사에 의한 학생 성희롱 실태조사’결과, 학생들이 교사로부터 성희롱을 경험할 경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이유로는 ‘학생들에게 알려질 수 있어서’가 52%로 가장 높았다. 폐쇄적인 또래 집단 사이에서 몇 년을 보내야 하는 학생청소년에게는, 자신에 대한 주변 학생들의 평판이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애너밸과 선혜에 대한 주변 학생들의 평판과, 그들 사이의 소문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이들을 괴롭힌다. 특히, 이들은 여성청소년이기 때문에 더 정도가 심한 소문에 시달리게 된다.


“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알긋나?”, “쉬이이, 애너벨”

<그냥, 들어봐>의 애너밸은 마지막에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했던 목소리는 사실 윌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애너벨 안에 생겨난 이유는 뭘까? 단지 애너벨이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너벨은 자신이 더 이상 ‘모든 걸 다 가진 여학생이 아니라 너무나 무기력하게 공격받고, 폭행당한 여자애’로 보이는 것이 두려웠고, ‘그 날’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는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울 것’을 요구하고,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를 당한 뒤 침착하게 신고를 하면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냐”,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신고를 하면 “(연인 사이였는데)악감정 때문에 누명 씌우려는 거 아니냐” 하며 ‘진짜’ 피해자인지 의심한다. 애너벨을 조용히 시키려고 한 건 결국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책들을 읽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랬다. <얼음붕대 스타킹>에서 주인공 선혜는 어두운 공터에서 낯선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 한 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애의 어깨가 자신에게 살짝 닿자 공터의 그 사내가 생각났다. 더운 여름에도 검고 두꺼운 스타킹을 벗지 않고 싶다고, 남자를 볼 때 성기가 있는 곳부터 보게 된다고, 공터를 지나는 게 너무 두렵다고 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등굣길에 붐비는 버스 안에서 성추행 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책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당신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주변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상황이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 성폭력 사건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함부로 얘기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도

노원 용화여고에서 포스트잇 행동으로 교내 성폭력을 알리는 움직임을 보이자, ‘아는 페미’[각주:1]는 이 소식을 알리며 ‘#소녀들은_영원히_어리지_않다. #강력한_여성이_되어_당신들의_세계를_부수러_올 것이다.’ 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을 올렸다. 미투 운동에서 종종 나오던 문구다. 이 게시물에 한 페이스북 이용자는 “영원히 어리면서 강력할 수도 있습니다. 강력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세계를 부술 수 있게 함께 연대해 줄 분들이 있길 바랍니다. '어리다'는 것을 나쁜 의미로 사용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사회에서 여성청소년은, 심지어 한때 여성청소년이었던 여성 비청소년들에게도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나서서 하기에는 힘이 없는 존재라고 단정 지어진다. 저 해시태그에는 소녀=약한 여성, 비청소년 여성=강력한 여성이라는 구도가 드러난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린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강하고 강력하며 당신들의 세계를 박살낼 것이다.”라는 대체적인 문구도 마음에 들기는 한다. 하지만 나이 어린 사람, 여성인 사람에게 적대적인 이 사회에서 여성청소년은 권력에서 배제당하는 약한 존재다. 책에서 선혜는 ‘두려워하면 안 돼’ 라는 말을 계속 곱씹지만, 그는 남자를, 그 날 들었던 누군지 모를 목소리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애너벨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 둘은 자신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친구들과 함께 대자보를 붙이고, 법원에서 증언을 한다. 약하고 겁이 많으면 뭐 어떤가.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고, 당신들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약하고, 어리고, 용기 없는 사람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갈 것이다.


-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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