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4. 21:38ㆍ리뷰 ver.청소년
혼자라는 것에서 살아남으며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나이 규제의 한 종류로 미디어 콘텐츠에 매겨지는 등급이 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심의 기관에서는 음악, 영화, 만화, 게임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에 대해 ‘청소년 유해성’을 심의하여 등급을 매긴다. ‘유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등급 분류에 고려되는 작품의 주제나 선정성, 폭력성 등 표현의 수위가 특정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일반화할 수도 없다. 19금 콘텐츠, 뭐가 그렇게 유해해서 청소년에게는 금지되는지 선을 넘어보기로 했다. 영화 <꿈의 제인>은 청소년 주인공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 청소년 필자 ‘이기’가 직접 감상하고 리뷰했다.
영화 꿈의 제인은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가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던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비춘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의식을 던지는 영화라기보다는 주인공 소현이 일생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현의 관계를 비춘다. 주인공 소현은 여성이자 탈가정 청소년이다. 그런 소현이 의지하던 유일한 사람인 정호마저 소현을 떠나버리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정호와 같은 바에서 일하던 제인이 찾아온다. 제인은 소현을 <뉴월드>로 데리고 간다. 영화는 그렇게 정호만을 의지하던 소현이 제인을 만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 상황과 관계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관계의 연속이다. 소현과 정호의 관계는 정호와 제인의 관계, 나아가 소현과 제인의 관계로 이어진다.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관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간다. 그 사이에서 소현은 혼자라는 것에 의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취약하다. 소현의 의연함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패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처세술인 것이다. 소현을 처음 봤을 때는 건조하고 무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곧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님의 이혼 후에 나는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자연스레 인간관계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사람이 되었다. 관계에 의연한 척했지만 누구보다도 관계를 신경 쓰던 내 모습이 소현과 참 닮아 있었다. 소현은 나처럼 자신을 마주하는 것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지쳐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정호가 떠난 후 소현은 혼자가 된다. 혼자라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을 마주한 결과는 소현의 자해로 표현된다. 외로움의 무게는 물리적으로 혼자일 때보다도 정신적으로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될 때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그 무거움을 지탱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다 은연중에 알고 있다. 어쩌면 한번쯤 그 무게를 지탱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외로움 속에서 우리는 외로워진 이유를 대부분 우리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외로움뿐만 아니라 우리의 밑바닥에 있는 감정까지 끌어올려서 마주해야 한다. 나의 이런저런 점 때문에 사람들이 떠나서 내가 외로워졌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나면, 이런 나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것은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소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호와의 관계에서, 제인과의 관계에서, 지수와의 관계에서 항상 소현은 혼자가 되어 왔다. 소현은 줄곧 혼자에서 오는 외로움을 마주해 왔을 것이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소현이 선택한 것은 온전히 나를 이해해주는 자신의 편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소현은 계속 그런 관계와 사람을 갈구한다. 영화의 시작에 그 대상은 정호였고 정호가 사라진 후에는 제인이었다.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항상 마음이 부푸는 느낌을 준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는 사이였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항상 내 이야기를 들어줬고, 나도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주고받는 사이니까 누구 한 명이 먼저 나가떨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정말 안 좋게 끝났다. 나 혼자 들떴을 뿐이고,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울었던 밤이 길다. 소현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욕심 부리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책하며 숨죽이는 밤이 소현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비단 소현뿐만 아니라, 우리는 항상 온전한 내 편을 갈망한다. 무의식적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갈구하며 그 사람을 묶어 두기 위해 어떤 관계를 갈망하고는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관계의 이름이 연인일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친구 또는 자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은 달라도 결국은 비슷한 선상에 놓은 관계들이 아닐까.
영화에서 소현은 결국 다시 혼자가 된다. 행복했던 시간들은 다 끝나고 이제 다 원래대로(혼자)로 돌아갈 거라고 말하는 소현의 어투는 덤덤하다.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그렇게 발버둥 쳤지만 다시 혼자가 된 소현이 어떻게 살아갈지 영화는 실마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생전 제인의 공연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 죽지말구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를 보면서 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끌어안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가 했던 “괜찮지 않아도 좋고,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한다. 당신이 괴로워도, 불행해도, 혼자여도, 괜찮지 않아도 좋다고. 그럼에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영화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속 소현에게도, 그걸 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