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2. 23:12ㆍ인터뷰
‘추억’으로 미화되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 A예고 인권 침해 사례집 《여기》 발간한 정진아 씨
“피해자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피해를 잊지 않기 위해, 왜곡하지 않기 위해, 가감하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훗날에 우리의 피해가 아득해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 때 그 일은 별 게 아니지 않았을까“ 혹은 ”고등학교 시절이 나름 괜찮지 않았을까“ 혹은 ”나의 잘못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질문들, 자기망각과 자기기만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로프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기록한다.”
- A예고 인권 침해 사례집 《여기》 내용 발췌
2018년 1월, A예고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 사례집 《여기》가 발간되었다. A예고 학생들은 교사에 의한 사생활 침해, 혐오 발언, 폭력 사건들을 제보 받고, 학교 측의 사과와 개선을 이끌어내기 위해 서명 운동을 진행했다. 《여기》는 A예고 재학생, 졸업생들의 제보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책자 발간과 판매를 기획한 A예고 졸업생 정진아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요즘것들(이하 ‘요’) : 책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정진아(이하 ‘정’) : 2017년 1월쯤에 누군가 SNS에 A예고 내에서 있었던 인권 침해를 고발하는 글을 올렸고, 많은 논란이 되었다. 인상 깊었지만 SNS의 특성상 한 번 화제가 되어도 영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으로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고, 사례들을 더 모아서 보여주면 더 많이 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책자 형태로 기획했고, 같은 과 친구들과 SNS에 처음 글을 올린 분에게 제안해 책자 제작을 위한 팀을 꾸렸다. 팀은 2월쯤에 만들어졌다.
요 : 제보는 어떻게 수집했나?
정 : 제작 활동을 활발히 할 때 재학생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우리가 겪은 일도 많이 넣고, 지인들한테도 제보를 받았다. SNS를 통해서 받은 제보들까지 합하면 몇 백 건이나 되었다.
요 : 사례집 내용 중에 교내에 있던 과가 폐과되는 과정이 문제적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정 : 올해 한 과가 폐과되었다. 그 전까지 그 과에 지원하는 학생도 별로 없고 대학입시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학교의 지원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소품이 워낙 낡거나 없어서 선배들이 사비로 소품을 사고 그랬다. 전공 연습실에 물이 새기도 했다. 폐과 여부를 결정할 때 소수의 학생회 학생들을 불러다 투표를 하게 했는데 선생님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고 폐과에 찬성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절차가 매우 부당했다.
요 : 예술고등학교인데 학업에 대한 압박도 심하더라.
정 : 예비소집일에 처음 학교를 갔는데 선생님들이 “너희는 예술고등학교에 온 게 아니다.”라고 한 게 충격적이었다. 입시에 실기 성적을 제외하고도 일반 교과목 성적이 중요하다 보니 공부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그런데 막상 학교 교육이 엉성하다. 교과목 중에 수학을 잘 안 가르친다. 학교에서 기대하는 대학을 가려면 수학이나 다른 과목도 세부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데 교육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원을 하려고 하지는 않고 학생 개개인이 해내길 바란다.
요 : 외모에 대한 규제가 심한데, 동시에 외모에 대한 비하 발언을 하는 교사들과 관련된 제보가 많다.
정 : 특정 예술 업계들이 고질적으로 외모 차별을 한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도 ‘예쁜’ 외모를 선호하는데 정도가 지나치다. 어떤 과는 학생들의 몸무게 표를 붙여서 공개하기도 했다. 아무리 대학과 업계에서 외모를 본다고 해도 학교에서 일상적인 부분까지 참견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 그러면서 화장이나 치마 길이는 엄격하게 잡는다. 하복 블라우스 중간에 끈이 있는데 그걸 뒤로 리본을 묶었더니 급식실에 못 들어가게 하기도 했다. 예고라는 것 때문에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불량하게 하고 다니지 말라, 학교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예비소집일 때 특정 교복 브랜드를 언급하면서 이 브랜드는 치마가 짧게 나오니 사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요 : 제작 과정에서 학교로부터 압박이 있었나?
정 :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SNS를 하지 마라, 할 거면 좋은 말만 올려라.”라고 했다. 웹 서치를 전문적으로 하는 교사가 있는데 언론뿐 아니라 학생들의 글도 서치를 한다. SNS를 통해 홍보를 넓게 하다 보니 제작한다는 사실을 학교 측이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SNS에서 처음 문제를 공론화한 학생과 그 학생 부모님이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시정 조치를 취할 테니 만들지 말라고 협박을 했다. 언론사에서도 기사가 나면서 교육청에서 감사가 왔다. 나는 시정 조치를 취해도 책자는 계속 발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엄청 무서웠다. 재학 중이었으니까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몰랐다. 졸업을 안 시켜주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요 : 교육청 감사 후에도 별 변화가 없었나?
정 : 그렇다. 교육청이 권고 조치를 하기는 했는데 우리 학교가 사립학교다 보니 교육청에서 개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들었다. 이후에 학교에서 한 것은 형식적인 교원평가 정도다. 서명운동을 했을 때 요구안이 있었는데 요구안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 문제 행동을 한 교사는 여전히 학교에 남았다.
- 서명 운동 진행 시 요구했던 사항들
하나. 우리는 교사와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한 폭력, 차별, 성폭력 등 인권 침해에 관한 제대로 된 인지와 그에 따른 공식적인 사과 및 징계를 요구합니다.
둘. 우리는 인권조례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교칙에 대한 개선을 요구합니다.
셋. 우리는 학생이 어떤 권력과 위계로부터 위협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넷. 우리는 학교의 열악한 환경 개선을 통해 학생 자율권 침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교육 환경을 보장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다섯. 우리는 이 외에도 학생의 요구 사항이 발생했을 시, 이를 논의하고 반영하여 학교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학교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학생회 운영을 요구합니다.
여섯. 우리는 학교, 교사, 선후배-동기 간 인권침해에 대한 주기적인 예방 교육, 인권 조례 내용에 대한 안내 교육이 실질적, 정기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일곱. 우리는 교원평가 및 인권실태조사가 온전한 익명으로 피해자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이루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여덟. 우리는 이후 학교에서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 학생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교내 기관과 절차가 마련될 것을 요구합니다.
요 : 책자를 배포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겠다.
정 : 배포를 하려고 교장선생님한테 갔더니 “이건 선생님들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것이다, 고소를 할 것이다, 월권이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래서 지인의 변호사 분한테 물어봤더니 월권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더라. 만들고 나서 반마다 1권씩 돌렸는데 선생님들이 다 회수를 했다. 배포를 도와준 재학생은 회수되기 전에 교장 선생님과 학과 부장님한테 붙잡혀 혼이 났다. ‘누가 했냐, 뭐 했냐, 주동자들과 어떤 관계냐’ 같은 질문들을 캐물었다고 한다. 학교 측에서 책자를 회수했으니 가져가라고 전화를 했는데 가지 않았다.
요 : 학교 측의 압박이 심했음에도 어쨌든 마지막까지 해냈다.
정 : 중간에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제보를 해주신 분들이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주셨고, 응원해주는 분들도 많아서 이 일을 꼭 마지막까지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우리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보니 다른 학교에서 참조할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야겠다는 책임을 느꼈다. 실제로 다른 학교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요 : 만들어진 책자는 홍보가 잘 되었나?
정 : 재학생들이 읽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책자 배포를 최대한 빨리 하려고 했다. 조금 무리해서 방학식 때 배포를 했는데 바로 회수가 돼서 아쉽다. 책자를 만들 때에는 산다고 한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다 만들고 배포하려고 하니 산다고 한 사람 중에 재학생이 별로 없었다. 홍보를 열심히 했는데 SNS에서 반응이 크지 않았다.
요 : 책자 배포 후에는 무엇을 했나?
정 : 책자를 판매하고 남은 돈과 후원금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후원했다. 지금 다른 계획은 없다.
요 : 책 서문에 사건이 잊히거나 미화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강조되어 있는데, 계속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정 : 팀원들끼리 혹시라도 기억을 미화시키지 말자고 말하곤 한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 청소년이 아니게 되면 사람들이 청소년 문제를 신경 쓸 필요를 못 느끼는데,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해자들은 남아서 계속 똑같은 행동을 하고 피해자들도 계속 존재한다. 나 혼자 편하자고 계속 일어나는 일들을 무시하는 게 지금 피해를 겪는 사람들에게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다.
요 : 흔히 청소년 인권 관련 일은 어른이 되면 해결될 것이라며 조금만 참으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나?
정 : 계속 참으라고 하니까 나처럼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도 압박을 더 심하게 받는다. “지금까지 이런 일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거다. 해봤자 바뀌지도 않을 텐데 왜 하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계속 시비를 걸고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 : 본인에게 책자 제작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
정 : 책자를 만드는 활동이 내 힘들었던 고등학교 생활을 털어버리는 일종의 ‘굿’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실제로 학교에서 폭력을 많이 겪었고, 실린 얘기 중에 내 얘기도 많다. 책자를 만들면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치유의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여기 실리지 않은 제보를 해준 사람들도 있는데, 그분들도 마찬가지로 제보가 자료집에 실리지 않아도 말하는 것 자체로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껏 폭력을 당하고도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말할 창구를 얻고 직접 말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되는 힘을 믿는다.
- 치이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