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19. 14:24ㆍ기타
최근 서울 한 고등학교 A양이 생리 조퇴를 하려 하였으나 교사에게 “그러면 생리대를 교체한 후 보건 교사에게 검사를 받아라.”라는 말을 들은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그 A양은 생리혈이 묻은 생리대를 보여줘야 한다는 수치심에 결국 조퇴를 포기했고, 그저 책상 위에 엎드려 생리통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여성청소년’들 중 한 번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들 한 번쯤은 생리통을 참고 체육 시간에 참여해 본적도,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불편과 수치심을 겪어야 했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와 내 친구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지만 서로 그 불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왜 내가 그런 불편을 겪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쉽게 던지지 못했었다. 누가 처음 그 주제를 꺼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똑같이 자연스럽게 불편을 공유하며 이야기가 흘러갔던 것 같다. 한번 터진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다.
(출처: 아수나로 서울지부 여성청소년팀 카드뉴스
<성차별, 성희롱 발언 사라져라 얍!>)
학교 수업시간 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열띤 수업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었고, 그중 유독 돋보이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수업에 대한 태도가 적극적이었다고, 교사에게 “여학생들이 기가 쎄서 남학생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 한다.”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나 또한 심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여’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적극적이면 안 된다는 선생님의 말에 화가 났었다. 왜 여학생의 수업 태도가 남학생에게 영향을 주는지 의문 또한 들었다. 또한, 친구도 교사의 그 말로 인해 자신이 위축됨을 느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의 경험에 의하면 교사가 “여자는 공부를 안 해도 얼굴만 이쁘면 시집 잘 가서 잘 먹고 잘 살수 있다”라며 수업시간 중 여학생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도 있었다.
사실 학교는 가장 대표적인 여성청소년이 폭력을 겪는 장소일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왜 여성청소년들은 하필 학교에서 많은 불편을 겪게 되는가?’ 이었다. 학교는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고, 청소년의 하루 중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너무나 이 불편에 익숙해져 있다. 아직 그것이 팽배해 있으며, 자연스럽게 여성청소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배우는 입장이기에 여성청소년들은 교사지도 불응 시에 오는 제재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으로 교사의 말에 불쾌감을 느껴도 딱히 불만을 표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들이 꼭 학교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경험을 빌리자면 한 여학생이 교복을 착용하고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나오다가 노래방 아주머니에게 “벌써부터 남자들과 어울려 노니까 재밌었냐.”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난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청소년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그 편향적인 시선과 편견, 함부로 비방의 말을 해도 된다는 그 태도는 너무나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치마가 짧거나 화장을 한 상태 또는 셔츠 윗단추를 몇 개 푼 경우에 “어려서부터 까졌다”, “요즘 애들은 조신할 줄 모른다.”, “나중에 커서 몸 파는 여자가 될 거냐.”라는 말을 들은 경험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었던 친구들은 수치심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간접적으로 듣는 나 또한 수치심에 화가 치솟았는데, 그 당사자는 어떠했을까. 심지어 번화가나 길 가던 중에 들었던 말이라는 점이 더욱 화가 나게 했던 것 같다. 여성청소년은 학교가 아닌 번화가 같은 공개적인 공간에서도 대놓고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가정에서조차도 이러한 일은 발생한다. 한 친구가 가족들에게 “커서 경찰관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가 “여자가 경찰관이 되받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라는 대답을 들은 일도 있었다. 그 친구는 가족이란 가까운 구성원에게서 듣게 된 비옹호적인말로 인해 상당한 좌절감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업의 성차별적 편견을 경험하고 청소년이라 이유로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되어 선택의 제재를 받는 일에 대해 부당함을 느꼈다고 한다. 문득 어쩌면 여성청소년은 평등으로부터 너무나 열악한 위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과 청소년, 차별을 받는 위치에 서있는 지위로서 동시에 그 지위를 갖게 되는 여성청소년은 여성보다, 청소년보다 부가적인 차별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여성성을 강요당하고, 제재당하며,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직접 비방으로 듣는 것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뒤 나와 내 친구들은 다들 느꼈을 것이다. 다들 똑같은 불쾌감을 느꼈고, 수치심을 느꼈고, 화가 났으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것들로 인해 위축됨을 느꼈고, 부당함을 느꼈고, 불평등함을 느꼈다는 것. 사실 우린 예전보다는 좋아졌다는 모순적인 위안 속에서 불편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결론은 여성청소년들은 아직 사회로부터 생각보다 꽤 많은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시선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조신함과 얌전함을 요구하고 있고, 능동적이기 보단 수동적이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해 훈계 아닌 훈계를 듣게 한다. 그 시선은 그들에게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폭력을 가하고 있고 여성청소년들이 아직도 제대로 된 인권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여성청소년들은 어쩔 수없이 그 상황에서 어떠한 의의제기나 불만을 표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는 요즘, 우리는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고 있는, 더 부가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청소년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여성인권’이 ‘성인’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도록, 어쩌면 지금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과제가 될 여성청소년의 인권보장에 좀 더 귀 기울여 들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구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