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0. 14:04ㆍ리뷰 ver.청소년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 리뷰
사진: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 공현·둥코, 교육공동체벗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는 여러 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 당사자들이 학교에서 겪는 인권 침해를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의 청소년운동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내가 청소년인권을 알게 된 것은 고3 5월이었다. 여성인권에 관심이 많던 학생이 야간자율학습을 째고 찾아간 추모집회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는 청소년인권단체를 만난 거다. 그전까진 학교에서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당하는 폭력, 억압들이 문제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알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청소년인권 활동가들의 존재는 내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아,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당한 일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의 권리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이들과 함께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장 아수나로에 가입했다.
활동을 하면 할수록 학생이라는 나의 위치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린 마일리지에 집착하며 교사들에게 잘 보이려 했던 나의 모습이,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낮은 나를 미워하는 내 모습이,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라는 사람의 전원이 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가 죽은 느낌. 학생인 내가 나를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청소년 활동이라고 생각했고 아수나로 창원지부에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수능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올 무렵, 같이 활동하는 분의 제안으로 '조례만드는청소년'(이하 조청)에 가입했다. 조례만드는청소년은 학생인권조례를 원하는 청소년, 활동가들이 모여 2018년 10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단체다. 사실 학생인권조례가 정확히 뭔지 몰랐고 활동을 시작한 지도 오래되지 않아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고 그냥 경남 청소년활동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기에 가입한 까닭이 크다. 1
이후 수능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에 참여했다.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조례안 공청회에 학생 발제자로 갔다가 반대 세력에게 물도 맞아보고, 집회 준비도 참여해보는 등 많은 경험을 했다. 그렇게 겨울 방학이 지나고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떠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조청에서 같이 활동하는 분이 ‘이번에 학교 졸업하는 사람들이 각자 학교 안에서 마지막으로 뭔가 하고 학교를 떠나자’고 제안했고, 그중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3명의 활동가가 각자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기로 했다. 청소년 인권 활동은 했어도 학교 안에서 뭔가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기에 걱정도 많이 됐지만, 혼자 하는 게 아니란 생각에 용기가 났다. 교사가 했던 혐오 발언, 학생인권침해 사례 몇 가지를 나열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썼다. 대자보에 함께 이름을 올릴 약 40명 정도의 친구들도 모았다.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가 조용히 술렁였다. 허가를 받고 붙이지 않으면 떼겠다고 인성부 교사로부터 전화가 왔고, 교무실에선 교사들이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고, 대자보에 적은 혐오 발언의 주인공인 교사는 나를 학년실로 불러 해명 아닌 해명과 대자보를 떼라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결국 내 손으로 대자보를 뗐다. 교사들의 반응이 무서웠고 이런 교사들의 반응이 자신에게도 영향이 갈까 봐 걱정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많이 외롭고 서운했다.
졸업식 날, 조례만드는청소년 홍보 팜플렛을 학부모들에게 나눠주고 졸업장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 교장에게 팜플렛을 건넨 것으로 고등학교 생활은 끝이 났고 그 이후 계속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을 이어갔다. 이야기가 무척 길었지만 여기까지가 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귀홍의 ‘청소년운동사’다. [인물로 만나는 청소년운동사]에는 2013년까지의 기록만 있다 보니 그냥 2019년 경남 창원에서 활동한 귀홍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은 건 오래되지 않았는데, 솔직히 후회됐다. 왜 학교에 있을 때, 대자보를 붙이고 그렇게 외로웠을 때 읽지 못했을까? 나에게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건 나뿐이고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2000년대 후반 경남·부산 등에서 청소년 활동을 하고 학내 운동을 이끌었던 성상영(밤의 마왕)님은 학내 시위를 준비했지만, 어느 학생의 밀고로 인해 좌절되고 학교의 억압을 받았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경험이 없을 때라 실수도 많았어요. 그래도 그것치고는 잘한 것 같아요. … 그리고 의의가 있죠.” 이 책은 대단하고 엄청난 저항을 이뤄낸 역사만을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큰 힘이 됐다. 동시에 나도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 안에서 혼자 ‘비정상’인 내가 잘못되었거나 틀린 비정상은 아니었다는 거. 그때 그 저항이 불필요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거. 나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싸웠던, 싸워오고 있는 사람들, 꾸준히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메시지. 학교 안에서, 학교 밖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사람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귀홍 기자
- 그린 마일리지: 상점(BP), 벌점(RP), 교정점수(GP) 등을 포함한 상벌점 제도이다. 경남에서 2009년부터 시행됐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