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직접 쓰는 '벌새' 리뷰] 나의 오랜 외로움의 위치와 아픔의 출처를 찾은 것만 같았다

2019. 10. 11. 13:22리뷰 ver.청소년

나의 오랜 외로움의 위치와 아픔의 출처를 찾은 것만 같았다.


-<벌새> 스틸컷


※ 이 글은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편이기도 했고, 이 영화는 혼자 봐야 한다는 말에 옆자리 하나가 빈자리를 예매했다. 여성 청소년의 이야기에 갈증을 많이 느꼈던 터라 여러 리뷰들과 예고, 뉴스를 사전에 많이 접해 기대는 점점 더 커졌다. 상영관은 사람들로 절반 이상이 채워졌지만 정말 조용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부터 나의 일방적 감상일진 모르겠으나 몇 번씩 이미 영화를 본 관객들이 1994년의 은희를 다시 한번 맞이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영화 상영 중에도, 얕게 배경음악이 깔릴 때도 흔한 영화관의 부스럭거림 없이 대사의 단어 하나, 배우들의 숨소리,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영화를 숱하게 봐왔지만, 처음으로 못들은 대사가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상영관을 나가야 할 때가 오면 은희와 이별하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은희의 행복과 평안을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별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은희의 삶은 놀랍도록 나와 닮아있었기에. 굳이 공통점을 찾으려 세세히 파고들지 않아도,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그 의미들이 가슴 깊숙한 곳에 박힌 나의 외로움과 고통의 출처를 명시했다. 그래서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계속 눈물이 났고 울면서도 눈물을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한 가정의 암묵적인 규칙 속에서 집 벽지에 발린 어두컴컴한 폭력의 찌든 내를 감내하고 참아온, 이미 폭력에 적응된 나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것만 같았다. 이따금 훈육이라는 이유로 맞을 때마다 반항한 적 한번 없었던 내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악에 받쳐 눈물을 줄줄 쏟아내며 아프다고 이야기했던 내가 은희 안에 있었고, 그런 나의 안에 은희가 있었다. 어릴 적 가해자도 보지 못했던, 피해 사실만이 뇌리에 박힌 캄캄한 밤에 당했던 가정 내 성추행,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온 다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나를 때렸던 대걸레. 내 안의 은희를 들여다보며 사실 우리는 행복한 가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폭행이 묵인되고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우위를 가진 채로 자신의 자식을 압박하는 추악한 작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확신했다. 은희가 지숙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엄마와 아빠가 나와 동생과 함께 학대를 당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고 가해자를 욕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며 나와 동생이 이따금 눈을 마주치면서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공감한다. 오빠가 은희를 때린 이유를, 은희가 학교에서 느끼는 압박감을, 은희와 유리의 감정의 결말을, 은희가 영지 선생님을 사랑했던 이유를 안다. 나도 모르게 은희가 성폭행을 당할까 걱정하고 마음 졸이며 결말까지 보고 나서야 안심했던 이런 원하지 않는 상황에 공감한다.

 

벌새의 영지 선생님은 이런 상처투성이인 나를 바로 보고 신비로운 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중후반부부터는 영지 선생님의 몸짓 하나 대사 하나에 눈물을 쏟았다. 벌새는 내가 만나지 못한 영지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었다


가정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많이 있지만 그런 기억들과 섞인 묵인된 상처는 크다. 그 시대를 살지 못한 내가 아직 은희와 같은 것을 견뎌내고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벌새는 더 알고 싶은 이야기보다 묻고 싶은 의미가 더 많다

 

이 글을 쓰면서 조차 눈물이 계속 나는 걸 보면 김보라 감독님과 은희, 영지, 유리는 나에게 엄청난 것을 준 것이 분명하다.


올바른 사랑을 갈망하며 여전히 날아다니는 많은 벌새들이 이 영화를 꼭 보았으면 좋겠다.


-2002년의 김은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