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직접 쓰는 '벌새' 리뷰] 한번은 스치게 될지도

2019. 10. 15. 17:11리뷰 ver.청소년

한번은 스치게 될지도


-<벌새> 스틸컷


※ 이 글은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는 은희를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때 나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그렇게 아프게 건드린 것일까요? 나는 서울에 살지도 않고 키스를 해본 적도 없고 혹도 떡집도 없는데 그 순간이고 매 순간일 시간 동안 은희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은희는 은희 그대로입니다. 내가 너무 자주 말을 섞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은 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은희의 말이 내게 닿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운이 좋게도 나는 은희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넘치지 않을 만큼만 엿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벌새>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친절한 사람들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의 짧은 당혹스러움이 은희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곱씹어보면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닿지 못할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빠에게도, 오빠에게도 있습니다. 거울 앞의 짧은 한숨에서도, 매일 보게 될 나의 손가락에서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얼굴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아주 찰나이고 또 너무나 농밀해서 우리는 볼을 붉히며 눈을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희는 나를 응시하지 않지만, 나는 은희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속마음을 똑바로 알기 위해 고개를 듭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나와 아주 닮았지만 절대 알 수 없는 시간의 이야기를 듣는 그 과정은 아팠습니다.


그 아픔은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슬픔들은 어디서 출발하여 여기에 도달한 것일까요? 그건 은희의 변주일까요? 우리는 그보다 선명한 정의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당분간 그렇게 부르기로 합니다. 은희는 보편의 은희가 됩니다. 모두가 은희들이 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나무 그림자에 흔들리는 얼굴을 보았습니다. 은희는 개별의 김은희로 보이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몇 살이냐는 질문에 중학교 이학년이라 대답할 때, 무심코 그렇게 소개될 수 있을 때. 우리가 그 말에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때. 져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은희는 그것들에 더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맞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서울대에 가기보다는 노래방에 갑니다.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합니다.


오늘 이 시간을 사는 은희들은 언제쯤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당장 내일일 수도 먼 훗날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뿐입니다. 변주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벌새의 날개가 우리 목구멍에 고인 거품들에 전달하려는 진동입니다. 누군가의 그것들이 단어가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면, 은희는 그의 이름이 되고, 그는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비로소 나의 이름이 너의 것보다 나의 것에 더 가까워질 때까지 말입니다. 걸음걸음은 조심스럽겠지만 어떤 형태이고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이제 적어도 우리는 그것의 날갯짓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