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5. 17:08ㆍ리뷰 ver.청소년
이제는 똑바로 마주해야 할 때
-<벌새> 스틸컷
※ 이 글은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있었던 벌새의 GV 진행자가 벌새의 주연인 박지후 배우에게 질문했던 말마따나, 90년대에 태어나지도 않은 나에게 90년대란 'nn년대생 공감' 따위의 제목으로 올라오는 인터넷 게시물이나 어른들이 지겹게 '요새 애들은 이런 거 모르지?' 라며 이야기하던 삐삐 혹은 서태지와 아이들, n년 전부터 범람하는 복고풍 카페(그 어른들이 고증에 맞지 않는다며 욕을 하는), 또 몇 년 전 유했던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밈 등이 뒤섞인 채 파편화되어 결국 '무언가 쿨하고 멋진 이미지' 만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미지의 시대다. 이런 인식의 저변에는 무지가 짙게 깔려있어서, 정작 90년대에는 어떠한 사회적 물결이 있었는지, 정치적으로 어떤 견해나 인식이 있었고 그게 현재까지 어떻게 계승되어왔는지 등의 그 시대를 이해할 만한 실질적인 단서들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있고, 어른들 또한 우리가 거기까지 알길 바라는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영화 벌새는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그릴 때 주류의 시선에서 '쿨'하고 색다른 이미지들, 체제의 입맛을 거스르지 않을 무해하고 순응적인 것들만을 편집해 보여주는 식의 접근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보다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류 바깥으로 밀려나고, 타자화된 삶 속에서 본연의 의지와 행동을 멋대로 재단 당하는 주체의 경험과 생각을 그 어떤 여과기도 거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함으로써 그것들을 거울삼아 90년대를 다시 비춘다. 자신의 존재를 내보일 기회를 박탈당한 자의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발이 되고 선언이 된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이 말이다.
화자 은희의 경험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상과 가장 큰 대척점에 있는 것은 한국의 미디어에서 일반적으로 재현되며, 기존의 90년대뿐 아니라 6·25 전쟁 이후부터 산업화 시대 너머까지를 관통하는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오순도순 단란하고 행복한' 정상가족 모델이다. 이 모델의 주된 구성원은 밖에 나가서 힘들게 일하고 돈을 벌어오는 자상하지만 엄격한 아버지, 자식들을 사랑하는 상냥한 어머니(가정의 모든 가사노동을 도맡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가끔 나오는 어머니 손맛의 집밥에 대한 찬양 이외에는 전무하다.), 의젓하고 듬직한 아들, 사랑스럽고 착한 딸, 가끔 포함되는 귀엽고 천진하게 애교를 부리지만 절대로 그 나잇대 아동처럼 떼를 피우거나 하지는 않는 막냇동생 정도로 전형적이다. 이런 스테레오타입이 겉으로만 봤을 때는 의도한 대로 오순도순 단란해 보일지 몰라도, 미디어 속 허구와 달리 현실 가정의 이런 단란함은 사실 고도로 위계화된 가부장제 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구성원들이 질서에 맞게 규정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거나 혹은 단순히 가부장의 기분이 언짢기라도 하다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피상적인 단계에 위치한다. 바로 그래서 더더욱 스테레오타입과 사회적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가족이나 그 구성원들에게는 폭력과 압박이 가해지고, 그 정도마저도 가부장제 질서 내의 위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가부장제 체제 내에서 승인되는 정상가족 모델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여타 미디어의 가족을 재현하는 방식과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지점은 이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구성원에 대한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소거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것이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점을 공고히 한다는 것에서부터다. 은희의 오빠 대훈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협할 때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며 숨어있다가도 수시로 은희를 폭행하고(후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지숙과 은희가 아무렇지 않게 이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영화는 이런 폭력이 한국 가정에서 보편적임을 드러낸다.), 겨우 은희가 이에 대해 꺼내놓았을 때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 채 대수롭지 않게 "싸우지 말라"며 넘기는 어머니까지, 가부장제 질서 내에서의 폭력은 강자에서 약자로, 약자에서 더한 약자로 점차 내려가며 당연한 일과로 자리 잡아 그 형태를 숨긴다. 이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내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네가 이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과응보인 것' 식으로 피해자의 잘못에 관한 결과로 변모하며, 이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인 반응이든 간에 정당하지 않은 것, 피해자가 이상하고 유난인 것인 양 치부된다.
영화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말고도 아주 많은 규범을 단지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위반한다. 은희는 '낙엽만 굴러가도 깔깔 웃는' 발랄한 10대 소녀의 판에 박힌 이미지를 찢고 나온 살아 숨 쉬는 인간이고, 가족들과 부대끼지 않을 때의 은희의 삶도 언뜻 잔잔해 보이지만 그 안엔 수많은 갈등과 풀리지 않는 감정들이 내재되어 찻잔 속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또한 영화 초반 담임선생의 날라리가 되지 말라는 훈계를 위시한 윽박지름이나 동급생의 파출부 운운하는 모욕까지, 은희의 삶을 둘러싼 폭력과 억압은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자리하고 이는 은희가 친구들과 갖는 즐겁고 행복한 경험과 공존하며 균형을 이룬다. 이는 여중생의 소소하고 활기찬 일상과도, 가련한 소녀가 겪어야 하는 끔찍한 고통과도 거리가 있다. 은희의 경험에 대한 벌새의 접근법이 탁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은희가 겪는 억압을 어른의 시선에 맞춰 표백하거나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극적인 비극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 떨지 않는 것이, 은희의 일상을 존중하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태도 자체가 여성 청소년을 바라보는 규범적인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고 의의가 있다.
아무튼 은희가 겪은 이러한 억압들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은희가 그를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이 바로 영지 선생님이다. 집보다 병원이 좋다고 말하는 은희에게 더 이상 맞지 말라, 누가 그를 때리면 맞서 싸우라고 이야기하는 영지 선생님의 말은 그저 어른의 아이를 상대로 한 훈계가 아닌 (영화 곳곳의 그가 운동권 출신이라는 암시대로라면) 독재정권 하의 국가폭력을 겪은 생존자로서 종류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폭력의 희생자에게 건네는 연대이자 응원이다. 영지 선생님은 은희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존중함으로써 은희가 스스로를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고, '당연한 일과로 자리 잡아 형태를 숨긴' 폭력을 마주하는 법을 깨닫게 한다. 그건 잘못된 일이고, 내가 착하지 않은 이상한 애라서 당연히 겪어야 할 일 같은 게 아니었다고.
자신을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된 은희의 날갯짓은 눈부시다. 억압적인 부모에게 처음으로 저항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숙과 그동안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화해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그리고 김보라 감독이 필연적이라고 이야기한 영지 선생님의 죽음 또한, 언니 수희와 함께 무너진 성수대교에 가서 똑바로 마주한다. 그에게서 배운 대로, 손가락을 움직여보며 조금씩 받아들인다. 감자전을 먹으며 은희는 엄마에게 묻는다, " 외삼촌 보고 싶어?" 은희는 처음으로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고 싶어한다. 엄마가 무신경한 가족들 사이에서 외삼촌의 죽음을 홀로 되새겼듯이 영지 선생님과 은희의 관계는 지극히 사적이었으므로 은희는 그의 죽음을 오롯이 혼자 애도해야 한다. 마지막 장면 학교 운동장에서의 은희는 소년 영웅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담담하고 명확한. 그는 더이상 체념하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80년대의 노스탤지어를 중심 키워드로써 차용한 TV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 가 시즌 3에 들어 여성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메시지를 내포함으로써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요지는 '그땐 그랬었으니까 괜찮다'며 차별적인 내용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 및 재생산하는 것이 문제라는 건데, 나는 이것이 주류 미디어가 기득권이나 체제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재현할 때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볼 때, 자본가의 눈으로 노동자를 볼 때, 침략자의 눈으로 식민지민을 볼 때 전부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병폐를 직시하지 못하는 주체가 편협하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재현이 범람하기 때문에 정작 정말로 목소리를 내야 하고,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 시대의 퇴보적인 면모를 비판하지 않고 좋은 부분만 부각한 노스탤지어 재현들은 그 자체로 반동적이라 생각하는데, 이와 달리 은희의 이야기에서는 94년의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청소년에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의 맥락을 읽을 수 있고, 그 폭력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은희는 94년과 지금을 잇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얻는다. 또 그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6-70년대 페미니즘의 슬로건 말마따나 지극히 사적인 동시에 정치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이 영화처럼 소수자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의 가장 야만적인 면모까지 똑바로 마주한 시대상이 사회적 파장과 때로는 반발까지 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벌새 GV에서 있었던 남성들의 각종 무례한 질문이나 김보라 감독에 대한 공격(심한 몸싸움으로 관계자 부상) 등이 일어났다는 것에 씁쓸하지만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공격이 더해질수록 우리가 더더욱 그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데에 겁먹지 말아야 비로소 우리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다. 또 다른 90년대를 돌아보는 영화 중, 그 시절 영 페미니스트들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다룬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에게는 역사와 시대를 똑바로 마주할 보다 다층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 이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