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직접 쓰는 '벌새' 리뷰] '벌새', 파편을 바라보는 눈

2019. 10. 9. 21:24리뷰 ver.청소년

'벌새', 파편을 바라보는 눈


-<벌새> 스틸컷


※ 이 글은 영화 <벌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주인공의 삶을 관전하는 것이기에 공감보다는 연민이 들기 쉽다. 연민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되 직접 느끼지 못하는 것,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며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1994년의 은희'에게 연민이 아닌 공감의 정서를 느꼈다. 집안의 분위기, 시대의 정서, 사는 곳까지, 많은 것이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것이 비슷했다. 좋아했던 친구가 갑자기 나를 멀리한 기억, 친한 친구와 싸우고 화해한 기억, 흠모하던 선생님과의 진솔한 대화, 예민하고 우울해지고 가끔은 화까지 났던 날들. 사소하지만 중요한 장면 하나하나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파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희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나의 파편들을.


 나는 그 파편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계속 그를 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가 나를 찔러 다시금 나를 아프게 할까 싶어 두려웠기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듯이. 하지만 우리의 세계에 한번 발을 들인 그 파편은 평생 우리의 삶에 남아있다. 덮어놓고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순간 떠오를 수 있기에, 평생 그와 공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파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파편을 버릴 수 없다면 파편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잘 바라봐 주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파편을 이해하고, 잘 바라봐 주는 것.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파편을 어느 순간 관대하게 바라보게 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 속 한 대목처럼,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누며, 그 파편들을 잘 보듬어 가는 것인가 보다.


 나에게 <벌새>는 ‘은희‘의 삶 속의 ’영지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 나의 파편을 잘 보듬을 수 있는 눈을 준 존재. 영지 선생님의 말들(우울할 땐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는 말, 더 이상 맞지 말고 맞서라는 말 등)에서 나는 마치 내가 그 말을 듣고,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담담하지만 힘 있는 애정의 그 목소리는, 세상의 모든 은희들에게, 또한 나의 내면의 파편들에게 말을 거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지 선생님의 부재가 은희에게 너무 크지는 않았을까, 너무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의 끝자락에서 영지선생님의 목소리로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라는 대목이 울려 퍼지자 순간적으로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은 갑자기 사라진 소중한 존재, 상처를 주고 떠난 존재가 아닌, 말 그대로 은희의 삶에서 무언가를 나눌 수 있었던, 그리고 은희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었던 존재이다. 영지 선생님은 부재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은희의 내면에, 어떤 형태로든 스며들어 존재할 테니까.


 누구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 은희의 파편과 비슷한 본인들만의 불안하고 삐뚤삐뚤한 파편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 은희와 닮은 조각들을 지니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든 청소년의, 그리고 청소년기를 거쳐온 사람들의 일부에는 은희가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영화. 그렇기에 <벌새>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아주 보편적이지만 아주 특별한, 이 세상 모든 벌새를 향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또한 우리는 이와 같은 곳에서, 삶의 유사함을 알아가며 우리 내면의 파편을 다루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새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