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위한 보호는 없었다

2019. 7. 3. 18:19극한직업청소년

날 위한 보호는 없었다




 

엄마는 항상 내가 집을 나서면 언제 집을 나가는지,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집을 나간 뒤 한참이 지나서야 연락을 하면, 엄마는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며 화를 냈다. 귀가가 늦어질 때면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갈 길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들어오라는 엄마의 연락과 표정이 두려웠다. 이런 걱정들은 나를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게끔 했다. 일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집에 들어가는 날도 많아졌다.

어느 날 애인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집을 나설 때 연락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학원 친구들과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유는 이후에 계속 연락하라는 엄마의 요구, 지금 뭐 하고 있냐는 질문 등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거짓말만이 이 모든 압박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부모의 ‘보호’가 계속될수록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이 시간까지 밖에 있어도 되나?’와 같은 걱정들이 생겨났다. 자꾸만 내 선택을 의심하게 되었고 내 존재가 무언가에 종속된 것 같았다. 나는 지금껏 있었던 부모의 ‘보호’에 저항할 의사가 없는 청소년이었다. 그저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하는 건 줄 알았고, 자식이니까, 청소년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호’가 나의 자존감, 부모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보호하는 사람들은 항상 너의 안전을 위한 거라고, 다 널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보호’가 과연 날 위한 거였을까? 대체 부모가 나를 ‘보호’함으로써 보호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보호하고 싶어 하는가?


애초에 그것은 보호가 아니다. 누군가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상대방으로 인해 나를 의심하게 되며 우울을 낳게 하는 것은 보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우위가 분명해지는 부모와의 관계에 항상 무기력감을 느껴야 했고,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때문에 무능한 나를 자책하기도 했고, 누군가의 감시와 압박 없이는 내가 나 자신을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도 느껴야 했다.


수많은 ‘보호’하는 사람들, 그중 대부분인 부모들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자식이 여성, 청소년, 막내라는 이유로 행하는 보호들이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지금까지 자식을 어떤 존재로 생각해왔는지를.


- 귀홍



이번 24호는 4.9통일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