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 22:00ㆍ칼럼-청소년의 눈으로
19금을 반박하다
19금 나이 규제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면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청소년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섹스하겠다고 하는 게 인권이냐?”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결론부터 말하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섹스하는 것도 청소년 인권이다. 이 글에서는 19금 나이 규제가 정당하다고 하는 주장을 살피고 반박해 보았다.
보호 : 막연하고 자의적인 규제의 구실
왜 나이 규제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청소년 보호’라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속은 대체로 텅 비어 있다. 내용이 비어 있기에 보호는 동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누구를 혐오하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로, 성소수자 혐오세력은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하기 위해 ‘동성애가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청소년 보호가 가진 정당성이 의심되지 않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들먹이는 파급력은 강력하다. 이는 실제로 동성애를 ‘19금’으로 규정하고 규제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근 커밍아웃한 가수 홀랜드의 뮤직비디오는 동성 간의 키스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이성 간의 키스 장면이었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청소년을 동성애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그저 청소년 보호를 빌미로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청소년 보호가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한, 청소년 보호는 혐오를 옹호하고 선동하는 데 활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누군가는 동성애는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유해한 것이 많고, 이것들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반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이 규제에 반대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유해한 것들의 유해성 여부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술이나 담배 등이 유해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문제는 특정 집단에 대한 유해한 영향만이 규제된다는 점에 있다. 술이나 담배는 나이뿐 아니라 개개인의 건강 상태 등에 따라 더 해롭거나 덜 해로울 수 있다. 보통 의사들은 중환자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할 것을 권고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규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한 판단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청소년에 대한 술, 담배 규제는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청소년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이다. 비청소년에게처럼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차단하고 규제하는 것은 청소년을 동등한 주체나 대화의 상대로 보지 않음을 드러낸다. 청소년의 몸은 ‘미래의 주역’이라는 이유로 관리되고 통제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차단이라는 방식의 한계
차단이라는 방식이 갖는 한계도 있다. 차단은 문제를 해결하는 본질적인 방식이 아니다. 예컨대 미디어 콘텐츠에 19금이라는 등급이 붙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폭력 등의 요소를 고민 없이 표현할 허가를 얻은 것으로 여긴다. 이때 사람들의 초점은 19세 미만인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향하지 콘텐츠에서 폭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로 향하기 어렵다. 폭력 장면은 어린이, 청소년이 그런 장면에 특별히 취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장면들이 사회에 폭력적인 문화를 조성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 자체의 폭력성을 문제 삼지 않고, 특정한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성폭력 문화가 만연한 조직에서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나이라는 허술한 잣대
나이라는 잣대가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문제이다. 나이는 연속적인 시간을 편의상 임의로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살아온 기간과 경험의 양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성숙에는 경험의 양뿐만 아니라 질 역시 영향을 끼친다. 비청소년이나 청소년이나 개개인의 삶의 궤적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르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19세 이상이 봐도 괜찮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에 따라 일괄적, 일방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불러올 수 있는 트리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안내하거나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것 등이 보다 현실적이며 절실한 것은 아닐까.
불법이니까?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규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이 그러하니 안 된다’는 주장은 거의 모든 소수자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법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 그저 그 시기, 그 사회의 인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은 것도, 유대인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한한 것도 법에 근거한 차별이었다. 법은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아니라,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청소년보호법’과 같은 법에서는 청소년이 유해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할 경우,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게 협조한 비청소년이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청소년에게 술이나 담배를 판매하는 비청소년 사업자/사업장이 처벌받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뉴스에는 종종 ‘죄 없는 비청소년 판매업자가 겉모습을 비청소년처럼 꾸민 영악한 청소년에게 속아 술을 판매했다가 처벌받았다.’는 식의 기사들이 보도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처벌의 책임을 청소년에게 묻는 것은 부당하다. 청소년은 스스로에 대한 규제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그 규제를 어겼을 때의 책임을 비청소년에게 묻자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규제로 인해 본질적으로 행위를 제한받는 대상은 청소년이다. 규제 자체의 합리성을 고민하지 않고, 규제를 지키지 않은 이들(청소년)이 규제를 만든 이들(비청소년)을 가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비청소년 중심적인 사고이다.
청소년들에게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 “할 거면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해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사실 법으로 나이 규제에 해당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금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이들은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는 규제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믿고 싶어 한다. 나태한 사고방식이다. 규제는 규제당하는 행위들을 음지화하여 더욱 위험하게끔 만든다. 공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지 못할수록 더 취약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주성홍 등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혼모들의 산전 진찰 횟수는 평균 3.27회로 일반 산모의 평균 진찰 횟수인 12.3회보다 현저히 낮다. 미혼모들이 모두 청소년인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그리고 미혼의 여성)의 성이 규제 당하고 있는 결과, 임신을 했을 때 산부인과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된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산전 진찰은 임산부의 건강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만큼, 청소년의 성을 규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을 조장하는지 알 수 있다.
하찮지 않다
혹자는 왜 이런 하찮은 문제에 열을 내고 더 중요한 청소년인권 의제를 건드리지 않느냐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찮은’ 문제를 온 사회가 달려들어 규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은 이것이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인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이 규제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청소년이 좀 더 떳떳하게, 인간적으로 살 수 있게 하자는 것과 같다. “19금을 부수고 청소년 해방 이뤄내자!”
- 치이즈 기자, 호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