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관계와 학교

2017. 11. 15. 21:56칼럼-청소년의 눈으로

청소년의 관계와 학교



 나는 12년 동안 줄곧 모든 성별이 다닐 수 있는, 흔히 ‘공학’이라 불리는 학교에 다녔다. 물론 공학이라고 다 같은 공학은 아니었다. 내가 나온 중학교는 여학생과 남학생 교실을 분리하는 ‘분반’ 공학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ㄷ’ 형태의 학교 건물에서 교무실을 사이에 두고 여남 교실을 나눴기에, 법적 남성인 나는 학교에서 여학생과 만나고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학교의 중앙복도는 단절의 공간이었다. 가끔 그 중앙복도에서 연애를 하거나 여학생들과 노는 친구들은 전복적이고 일탈적인 존재였다. 학교는 그런 일을 막고 처벌하려고 무단히도 애썼다. 분리가 효율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학부모에게 학생들의 연애 문제로 인한 항의를 덜 듣기 위해, 그리고 학교의 목적인 ‘입시’에 학생들이 매진하게끔 하기 위해 우리는 분리되었다.


 분리는 타자화를 동반한다. 타자화란 특히 사회적 소수자와 같은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 ‘차이를 가진’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이질적인 집단으로 부각시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다닌 분반 중학교 남자반에서 가장 주된 타자는 여성·비남성이었다. 단단한 남성연대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성애-남성중심적 사고를 강화했고, 여성과 성소수자를 쉽게 타자화하고 희화화했다. 중학교에서의 3년은 내가 가장 폭력적이고 차별적이었던 시기였으며,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생각을 바꿔나가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또는 그 이상을 보내는 학교는 ‘분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학교는 여러 방식의 분리를 만드는데,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학교는 분리를 만든다


 첫째는 학교 안에서의 분리이다. 학교는 학교 안에서 다양한 잣대를 가지고 임의로 학생들을 분리한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성별 분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학교는 나이, 성적 등에 따라 학생을 분리하고 있다. 특히 학제는 ‘나이’를 기준으로 편성되어 있다. 연 나이로 8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후로 쭉 같은 나이의 사람들과 한 학년을 구성하여 관계를 맺어 나간다. 학생들의 인간관계 대부분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에 한정되며, 교사를 제외하고 세 살 이상 차이나는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도 드물다. 학교는 선후배관계에 따른 나이위계가 유독 견고한데, 이는 3년을 사이에 두고 태어난 사람들을 학년으로 구분해 분리하는 제도가 견고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계급을 칼같이 나누는 공간일수록 위계도 단단하다.


 나이위계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가치를 후대에 더 쉽게 전달하려는 사회화의 수단 중 하나다. 평등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 이런 나이위계를 용인하는 까닭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이위계는 보수적인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자 보수적인 가치 중 하나로 대물림되어 청소년들의 관념에 자리 잡게 된다. 학교는 차별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둘째, 학교는 학생을 학교 밖으로부터 분리한다. 한국의 학교는 마을공동체나 시민사회와 철저히 분리되어 교사-학생, 학생-학생 이외의 관계를 차단한다. 학생의 인간관계가 교사보다는 학생끼리의 관계에서 더 밀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학생·청소년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그들끼리의 관계에 한정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교는 비슷한 언어와 문화, 학력, 나이, 생활반경, 거주지 등을 가진 학생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물론 학생 집단 안에도 미묘한 다름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수가 비슷한 환경과 경험을 공유하는 탓에 필연적으로 보편과 정상성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이런 관념은 ‘나와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견고해진다. 학교는 학생들이 타자를 이질적인 존재로 여기고, 차별과 배제를 일삼기 쉬운 구조로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걸핏 보기에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조금씩 다른 경험과 상황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 탓에 학생 모두는 끊임없이 어떤 보편과 정상성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행하는 따돌림 문화 또한 이러한 정상성 수행의 일부이다.


 셋째, 학교는 (정상)사회로부터 학생을 분리한다. 흔히 학생·청소년은 ‘사회로 나가기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비유된다. 사실 우리도 같은 사회에 살고 있고, 상호작용하는 주체로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늘 옆에 존재하는 우리는 시민도 아니고, 주체성을 가진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보이고 만져지는 투명인간일 뿐이다.


 이런 관념은 학생·청소년을 사회에서 물리적으로 격리시킨다. 사회는 아직 학생에게 위험한 곳이기에, 또는 어른들의 세상이기에 학생을 제외시킨다. 비청소년 사회에 학생·청소년이 있을 경우 그들은 특수한 존재로 취급당한다. “학생이 대단하네, 기특하네.”, “요즘 학생들은 이런 데를 다 오네.”, “부모님은 이런 거 하는 거 아시냐.” 등의 표현은 학생·청소년을 사회적 존재로도 주체적 인간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을 반영한다.



해결책은 학교 관념의 해체


 학교는 ‘학생’에 대한 관념을 만들고, 그 관념은 곧 청소년에 대한 관념이 된다. 학교라는 제도는 그 자체로도 청소년을 억압하며, 청소년을 억압하는 관념을 재생산한다. 학교는 청소년에게 차별과 억압을 가르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 안의 협소하고 분리적인 관계에 익숙해진 이들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계를 인위적으로 박탈하고 배제하며 격리하는 것은 분명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학교 제도가 만들어내는 이런 ‘청소년 분리’의 과정과 결과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필요한 것은 ‘학교 관념‘의 해체이다. 학교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벽이 없고, 위계가 없고, 분리가 없어야 한다. 옥죄는 공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만의 ’작은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일부여야 하며, 모두의 공간이어야 한다. 학생·청소년은 일상에서, 사회에서 뒤섞여 함께하는 주체여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을 위해서 학교 관념의 해체가 필요하다. 우리의 다양성을 위해, 청소년의 다양한 관계맺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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