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스페미니즘] 내게도 밤에도 안전할 권리를 허하라

2016. 6. 26. 21:10틴스페미니즘


나는 언제나 건드려져 왔고, '건드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긴장해야 했다.

집에 항상 들어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이 넘으면 혼이 났다.



[틴스페미니즘]은 여성청소년이 여성이자 청소년으로서 겪는 

복합차별을 다루는 페미니즘 에세이 릴레이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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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밤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의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 편의점에서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은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2~30분을 간 다음에 걸어서도 10분을 가야했다. 버스를 타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걸어서 가는 10분은 무서웠다. 편의점이 꽤 후미진 주택가 안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는 가로등도 별로 없었고, 인적도 드물었다.

출근을 했다고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주변에 유흥가게들이 있기도 했고, 슬럼화 된 구 도심의 주택가 한복판이라 거나하게 취한 취객들이 많이 찾아왔다. 술냄새를 몸에 두르고 비틀거리며 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오는 초췌한 이들도 있었지만, 잔뜩 의기양양해져 큰소리를 치며 들어오는 이들은 매우 두렵게 느껴졌었다. 나는 그런 이들이 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바코드 리더기를 잡은 손을 떨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고 부러 큰 소리로 그들을 응대했다. 두려움이 그들에게 만만함으로 비춰질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출입문을 보고 있다가 남성들-특히 중년 남성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이면 미리 112를 써 놓은 휴대폰을 포스기 위에 보이지 않게 올려두곤 했다.

이런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면, 흥미롭게도 반응이 두가지로 갈렸다. 공감되고 힘들었겠다는 반응과,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반응. 일반화 할 수 없겠지만 전자의 반응을 보인 것은 대부분 여성들이었고, 후자의 반응을 보인 것은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후자에 대해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부분 이런 걸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모든 취객이 그런 것은 아니므로. 또 나와 대화하던 이들은 본인이 그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 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반응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그들의 말이 옳은가는 아주 별개의 문제다.

두려움을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가끔 오는 이들 중에서는 매우 취했으면서도 굉장히 예의 발랐던 이들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끔이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대다수였다. 불쾌한 시선을 던지고, 짐짓 멍청하다는 듯 말을 건네고, 깔보고, 무시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그 '깔봄'이 어느 정도였냐면 전자레인지에 라면을 돌리지 말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제 대학 학생증을 건네 보이던 사람까지 있었다. 또 실제로 위협을 당할 뻔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주는 내 손을 잡으며 "손이 따뜻하시네요."라고 능글맞게 웃던 사람, 담배를 찾는 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애 잘 낳겠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사람도 있었다.

예의 바른 이들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꿈같은 이야기다. 조금 뜬금없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1971년 무하마드 알리는 "모든 백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라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뱀 10,000 마리가 내 방 쪽으로 오는 데 그 중 1,000 마리는 착해서 날 안 문다 치죠. 그럼 그 1,000 마리가 뭉쳐서 날 막아 줄 거라 믿고 문을 열어두나요, 아니면 문을 닫고 안전하게 있어야 하나요?" 백인과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단어를 술에 취한 남성, 위협적인 인물로 각각 바꿔보자. 대답은 같다. 이게 내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밤이 되면 더더욱 심하게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답이다. 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그만 두었다. 정확히 한 달쯤을 일했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생활패턴이 망가져 건강이 나빠졌던 것은 뒤로 하고서라도 두려움을 더 견딜 자신이 없었다. 밤은 내게 불친절했다. 불친절한 밤 거리에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 그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건 사실 남성들 뿐이다.

나는 '안전한 한국'에서 살고 있지 않다


"에이, 한국만큼 안전한 나라가 어딨어. 밤에 술 취하고 돌아다녀도 누가 건드리지도 않는 나라가 많은 줄 알아?" 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안전한 한국'에서 살고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건드려져 왔고, '건드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긴장해야 했다. 집에 항상 들어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이 넘으면 혼이 났다. "밤엔 위험하니 돌아다니지 마라"는 말도 들었다. 웃기지 않나? "한국만큼 안전한 나라"는 없다면서! 그들이 말하는 안전한 나라는 청소년+여자인 3등시민인 나에게는 없는 곳이다. 그리고 특정 계층 이외에는 안심할 수 없다면, 그 곳은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말들이 마치 떼쓰는 것처럼 느껴지고, 아니꼽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야간 알바라면 그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또, 그 시간에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 행위 아니냐고도 할 수 있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다. 늦게까지 일하면 위험하니 야간노동을 금지하자, 라는 말은 차라리 낫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으면서 위험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건 무슨 짓인가? 나는 '야간에 일을 해도 괜찮다'라는 말에 동의했지, '야간에 일할 때 일어나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겠다'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안전하고 싶다.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다. 내가 감수해야 할 두려움이 단지 어둠에 있는 인간의 기본적 두려움에 그쳤으면 좋겠다. 더운 여름밤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기실 내게 밤이 안전했던 적은 없다. 아주 가끔 있는 여성 취객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야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바로 앞에 있는 공원 화장실에 가면서도 두려웠던 게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왜 나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가?



치리

Everything has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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