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30. 15:58ㆍ칼럼-청소년의 눈으로
청소년의 눈으로
:: 일진과 왕따 그 너머의 사회폭력
2011년 말,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어느 중학생이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했다고 했다. 이후 학교폭력을 적발해서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하네,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네 학교가 시끌시끌했다. 형식적으로 하던 설문조사도 제법 문항이 늘었고, 지겨울 만큼 자주 예방교육을 들어야 했다. 교육 내용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었다. ‘욕설하는 것도 사소한 장난도 학교폭력이다. 요즘 분위기 험악하다. 걸리면 인생 망친다.’ 교사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얼마의 벌금 혹은 합의금과 빨간 줄 따위의 협박을 반복했다. 성별이나 경력 따위에 따른 교사 사이의 서열, 모두가 피부로 느끼지만 까놓지는 못하는 교실 안의 서열 같은 현실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없는 취급을 했다.
그러고 나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불쌍한 왕따와,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성격이 못돼 처먹은 일진이 문제로 남는다. 그러니 왕따는 적응시키고 일진에게 벌을 줘서 겁을 먹게 하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참 편리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가진 권위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꽤 구미당기는 방법일거다. 일진에게는 ‘너희 그러다 인생 망친다’라고, 왕따에게는 ‘먼저 다가가고 그들처럼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나머지에게는 ‘방관하지 말고 불쌍한 왕따를 도와주렴’하고 늘 해왔듯이 청소년들에게 훈계하면 그만이니까. 자기와 직접 관련된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색낼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 때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은 단순히 ‘언어폭력’이니 ‘금품갈취’니 하는 몇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거였다. 대략 이런 순서였던 것 같다. 1, 반에서 몇 명을 ‘왕따’, ‘찐따’ 등의 이름으로 낙인찍는다. 이유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왜냐하면 2, 낙인을 찍고 나면 그의 말투, 걸음걸이, 연필을 쥐는 방법 모든 게 그가 따돌림 당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있을 때 특이한 점이나 작은 단점이라고 넘길 수 있는 게 그에게 있을 때 이상하고 싫은 점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서는 안 될 일이 그들에게는 해도 되는 일이 된다. 그런 합의가 왕따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떤 유대감을 형성하고 화젯거리, 놀 거리가 되었다.
이는 사회에서 소수자들을 괴롭히는 방법과 꼭 닮아있다. 한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일베 등 남초 사이트에서 한국 여성을 ‘김치녀’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었다. 남자를 돈줄로 보고 사치를 부린다는 것에서 시작해 키와 가슴이 다른 인종 여성에 비해 작다는 것까지 별별 것이 이유가 된다. 여성 평균임금이 남성 평균 임금의 70%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과, 경제적으로 상대에게 의지할 때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쉽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나머지 김치녀 아닌 이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몰래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돌려보면서 유대감을 형성한다.
학교폭력은 몇 명의 못돼먹은 청소년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다.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낙인찍기와 소수자 혐오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것뿐이다. 성소수성, 임신경험, 장애, 빈곤한 학생, 정상가족에 속하지 못함, 외모 등 사회에서 차별받는 요인으로 학교에서도 차별받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런 요인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게 터부시되지 않는 사회에서 새로운 왕따를 만드는 건 너무 쉽다.
이제 학교폭력을 두고 한걸음 물러서서 학생들을 훈계하지 말았으면 한다. 청소년들의 문자메시지를 검열하고 폭력적인 게임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뚱딴지같은 해법을 내놓지 말았으면 좋겠다. 낙인찍기와 서열로 위태롭게 유지되는 사회를 부수고 고쳐나가자. 진정한 의미로 ‘함께’ 말이다.
[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