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8. 16:40ㆍ인터뷰
임신중절을 겪은 청소년에게도 안전하게 살 권리를
사진: 한국여성의전화 김희지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프레임이 문제적인 이유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행위를 한 ‘어른의 말을 듣지 않은’ 청소년을 보호받을 자격에서 박탈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적 행위는 그런 대표적 행위 중 하나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폐지 판결은 여성 청소년에게 가해져 온 사회적 낙인과 처벌의 고리 하나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6년에 요즘것들과의 인터뷰에서 청소년으로서의 임신 중절 경험을 밝혔던 라일락을 만나 당시의 소감을 들어보았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한 소감은?
개인적으로는 단순 위헌이 아니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서 아쉬웠다.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인해 2020년 말까지 현행법이 유지되면서 여성들이 임신 중절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법의 공백 상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기존의 낙태죄가 문제라는 법적/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은 기쁘다.
3월 30일에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서 청소년으로서 경험한 임신중절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나?
이 집회는 사회적으로 이목이 쏠린 재판을 앞두고 하는 집회였기 때문에 큰 파급력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발언했을 때 언론에 나가게 되면 가족들이 알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발언했다.
2016년에 처음으로 요즘것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매체를 통해 임신 중절 사실을 밝혔다. 그 이후 책 <걸페미니즘>에서 공동 저자로서 경험을 쓰기도 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해 참여한 활동이 임신중절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나?
임신중절을 하기 전까지, 낙태는 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실제로 임신을 하게 되고 임신중절을 고민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임신중절 이후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조금씩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낙태에 씌워져있던 프레임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낙태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사회적 관습과 법, 문란한 청소년이라고 낙인찍는 시스템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점점 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 같다.
청소년이 임신중절을 하는 경우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임신사실을 털어놓기 두려워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대부분의 청소년은 부모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의존해서 삶을 이어나가는데,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기반이 없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임신중절을 했을 때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 문제였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을 하는 데에 타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 한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끼친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청소년도 부모와 독립된 존재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임신중절을 하는 청소년이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부모의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청소년이 안전하고,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라일락의 경험에서 안전과 보호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어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위험한 청소년’이었다. 집을 나와서 살았던 청소년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했는데, 알바를 하는데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고, 청소년이기 때문에 돈을 제대로 주지 않는 등의 위법적인 일을 많이 겪었다. ‘가출청소년’이라는 사회의 낙인 때문에 자립을 꾸려나가는 데에 힘든 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집을 나와서 그전보다 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부모는 내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집을 나가라고 말하거나 용돈을 끊을 거라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탈가정을 하면서 이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사회적 장벽이 있었지만, 그 장벽들에 맞서 싸울 때 동료들이 지지해준 덕분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집을 나온 이후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나?
맨 처음에 집을 나왔을 때 같이 활동하던 비청소년 친구가 있었는데, 내게 밥을 사줬다. 그 친구는 자기도 집을 나왔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밥을 사줬고, 그게 힘이 됐다고 이야기했다. 나한테도 마찬가지로 힘이 됐다. 활동가들 간의 암묵적인 지지 체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그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다들 지지해준다.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청소년을 구분하는 기존의 프레임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기존의 프레임으로 나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학교와 사회는 학생을 ‘질이 나쁜 애’와 ‘모범생’으로 구분한다. 그렇게 청소년을 분류하는 주체는 청소년을 통제하기 원하는, 사회에서 조금 더 권력을 가진 비청소년이다. 사람은 살면서 행복한 순간을 누리기도 하고 위험한 순간에 처하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는 특정한 경험을 겪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낙인찍거나 선악으로 분류한다.
어른들의 시각에서 착한 청소년은 무성적인 존재여야 하고, 자신의 성적 생활을 20대 이후로 미루어야 한다. 성적 주체로서 성을 즐기는 청소년은 나쁜 청소년으로 여겨지고, 청소년이 임신한 것은 그 사람의 문란함 탓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청소년도 성적인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이다. 100% 완벽한 피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지 않는 한국에서 청소년이 임신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으로 생긴 아이를 낳고 기르기로 결정할 때, 생명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졌다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아이를 낳은 10대 여성은 착한 청소년인가? 한편 대부분의 사람은 청소년 시기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보다 공부를 해야 되는 때라고 한다. 그렇다면 임신을 한 청소년은 임신 중절을 해야 착한 청소년인가? 이처럼 기존의 프레임은 다양한 맥락이 있는 청소년의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청소년을 성적자기결정권을 지닌 성적 주체로 인정하고, 개별 청소년들의 삶에 필요한 지원과 사회적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 치이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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