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2. 20:04ㆍ리뷰 ver.청소년
혼자서 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
- <만나보고서 : 청소년 자립, 아홉 현장 이야기> 리뷰
* <만나보고서-청소년 자립, 아홉 현장 이야기> 는 1월 중에 판매 예정입니다.
<만나보고서>는 청소년 자립을 지원하는 <자몽 프로젝트>를 통해서 아홉 개의 현장을 지원하고 그 현장을 찾아가 활동가들과 청소년들을 만나보고서야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다.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 자립팸 <이상한 나라>처럼 의식주를 지원하는 현장에 도움을 보태기도 하고, 안산 <키움학교>, 꿈꾸는 아이들의 학교의 <플랜비>처럼 의식주를 넘어 자립을 지원하는 현장에 도움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게 살 거면 자립하던가.”라는 말을 자주 듣던 나에게 자립은 원하는 것인 동시에 두려운 것이었다. 홀로 내팽개쳐지는 것 같은 기분, 아무도 나를 지지해주거나 지원해주지 않고 홀로 살아 남아야 하는 게 바로 자립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만나보고서>는 자립은 꼭 외롭고 혼자서 버티고, 일어서야 하는 것인지 되묻는다.
나는 왜 그렇게 집에서 나가고 싶어 했을까? 그 이유를 찾아 내려가다 보면, 자퇴 후의 나의 모습이 보인다. 나에게 대학은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부모님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시작하지 말아라.” “내년에 다시 학교에 들어가라.” “괜찮아. 나는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라는 폭언과 부담스러운 기대의 말들이 날라왔다.
자퇴 후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공간이라 믿었던 곳은 내 부모의 공간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 방 한 칸조차 마음대로 문을 잠그고 열 수 없다면, 내 공간이라 불리는 곳에서까지 저 말들을 피할 수 없다면 그 공간이 무슨 소용일까.
진짜 내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부모에게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검정고시 공부도 시작하겠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거리만 멀어진다면, 어떤 조건이든 괜찮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다툼에 지친 건 나만은 아니었는지 다른 지역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친구를 데리고 와서 같이 잘 수 있을 때, 마음대로 방을 꾸밀 수 있을 때, 곧 쫓겨난다는 생각을 안 해도 될 때, 구속받지 않을 때, 집은 이들에게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그때 집은 건물이 아닌 마음의 장소가 된다.”라는 구절을 <만나보고서>에서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에 온 첫날 밤이 떠올랐다.
내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따라오는 가사노동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버틸 수 있게 했다. 오늘 밥은 뭘 만들지, 집에 필요한 건, 내가 사고 싶은 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들이 나에게는 자립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글 제안을 받았을 때,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 자립한 청소년의 입장으로 글을 쓰는 것이 맞는 걸까 하는 고민에 주춤하기도 했지만, <만나보고서>를 읽으면서 자립이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상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꼈던 자립은 모든 걸 혼자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삶의 중심을 잡는 것에 더 가까웠다.
모두가 다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 경제적으로 기대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기대기도 한다. 그런 기댐을 무능력하거나 혹은 영악하다며 욕하지만,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으면 고립되기 마련이다. 평균대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 가끔은 잡아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자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나보고서> 속의 <EXIT>의 이야기에는 의존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기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IT>는 생활 지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비치한 버스를 이끌고, 경기 안산과 부천을 다니며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활동을 하는 움직이는 청소년자립지원센터다 0.<
“청소년들이 여기는 내 이야기가 먹히는 곳, 이 공간에 내 자리, 내 지분, 내 역할이 있다고 느끼길 바랐어요.”라는 활동가의 말이나,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이해를 못 해도 이야기를 들어 주려는 사람을 만나 “진짜 여긴 신세계다!”라고 이야기하는 청소년 다원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실은 부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내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 저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나를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든 자립이 그렇겠지만, 청소년의 자립은 더 힘들다. 지금 집으로 이사할 때 “집에 남자친구 불러서 살림 차리고 그럴 거 아니지?”라는 말을 들었다. 청소년의 자립은 마치 사건 사고와 탈선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자립을 꿈꾸기 위해서는 물적 지원과 환대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에 가장 큰 걱정이었던 것은 나에게 꾸준한 소득과 머물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만나보고서>에 나오는 주거공간 지원이나, 지원금 이야기가 반갑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주거공간 지원이나 경제적 지원은 그 사람이 안전하게 생활을 이어나가게 하는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물적 지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심리적 지원도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심리적 지원을 '환대'라고 부르고 싶다.
환대받는 경험은 자립을 꿈꿀 힘이 된다. 어떤 조건 아래에서만 반겨지는 환대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그 사람의 의견을 반영한 환대가 필요한 환대라고 생각한다.
덜컥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였던, <꿈드림>을 찾아갔다. <꿈드림>의 활동가분들은 분명 나를 반겨주었지만, 나는 다시 가지 않았다. <꿈드림>과 <EXIT>는 똑같이 청소년에게 식사와 여러 활동을 지원하지만, 왜 <꿈드림>보다 <EXIT>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많이 향할까. 나는 그 이유는 <EXIT>는 청소년들을 대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꼈던 <꿈드림>은 오가기가 자유로운 학교 같았다. 교사에게 듣던 반말을 활동가에게 들었다. 활동가는 청소년들과의 친근감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거기에 나의 의견은 없었다. 당연히 검정고시나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부담감도 들었다. 그런 조건들을 달고 있는 반김은 나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청소년운동을 시작하고, 모임에 나갔을 때 느꼈던 반김은 달랐다. 똑같은 반김이었지만, 이번에는 반말을 듣지도, 어떤 걸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글을 쓰며, 내가 왜 <꿈드림>과 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소속감을 청소년 운동에서 느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옷을 단정히 입고 염색을 하지 않아야, 공부를 해야 반겨질 수 있었던 <꿈드림>이나 학교에서 나는 반겨지지 못했지만, 청소년 운동은 내가 공부를 잘하던 하지 않던, 염색을 하던 안 하던 나를 반겨주었고 내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나를 반겨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는 경험은 단지 반겨짐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사람에게 있어 믿고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만듦으로서, 나를 보듬어줄 사람들이 있고, 기댈 품이 있다.는 믿음으로 자립을 이어나갈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립을 해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삶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기댈 수 있고 고통이나 기쁨을 나누는 의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 없다면, 과연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청소년의 자립을 일탈이나 탈선으로 생각하지만, 청소년은 대학을 가거나, 어른이 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청년/중장년 세대의 삶의 목적이 단지 노후대책을 위해서라면 그 삶은 얼마나 슬프고 공허한가. 청년/중장년 세대의 목적이 다 다른 것처럼 목적이 다양한 것은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자립해나가는 과정은 그 삶의 목적을 채워나갈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목적으로 삶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도 자립과 자립 지원은 필요하다.
-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