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7. 21:27ㆍ틴스페미니즘
왜 ‘페미니스트 동료’냐고 물으신다면
*이 글은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의 논평 <우리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합니다>를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올해 여름, 한 초등학교 교사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신상털기와 비방, 테러의 표적이 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여성이나 소수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모욕·폭력을 당하지 않는 미래가 필요하다.”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의 현실을 보여준다.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에서는 ‘페미니즘, 동성애, 남성혐오’를 가르친다며 해당 교사의 즉각 파면을 요구했다. 아직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성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교육을 실시했다는 이유다. 이에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는 연대를 위해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캠페인을 진행했다. 많은 이들이 학교에서 겪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폭로하며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토로하였다.
▲ [사진1]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이
페미니스트 교사의 즉각 파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 (2017/09/05)
▲ [사진2] 페미니스트 교사와 연대하기 위한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공동행동 (2017/08/26)
그런데 나는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이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로 귀결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선생님’만으로 학생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권침해와 폭력이 해결될 수 있을까?
교사뿐 아니라 학생들도 학교에서 살아가며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위협에 시달린다. ‘여학생’과 ‘여선생’에 대한 외모 품평, 지정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진로교육, ‘여학생’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교칙 등 우리는 학교에서 매일매일 여성혐오를 경험한다. 반복되는 여성혐오 속, 학생이 가진 선택지는 많지 않다. 침묵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페미니즘을 외치거나. 그러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메갈’로 낙인찍히고, 교사에게 실질적인 징계를 당하는 등 페미니스트 학생들은 발화 즉시 위협에 시달린다.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교사나 학생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건 운이 아주 좋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발화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운이 좋지 않은’ 대다수의 청소년 페미니스트를 알고 있다.
페미니스트 학생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학교는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을 배움의 전부로 취급한다. 다양한 의견과 진로는 무시되고 하나의 입시만 따를 것이 요구된다. 성공하기 위해 획일화와 경쟁과 낙오, 차별과 배제에 순응할 것이 요구된다. 사실 페미니스트 교사 테러 사건은 별로 놀랍지 않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주입식 교육과 익숙한 폭력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성주의적 대화가 아니라, 개별의 존재를 지우는 일방적인 강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학교는 페미니스트 교사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우리에게 반여성주의적 공간이다.
이번 테러 사건으로 우리는 발화권력이 강한 교사마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여성혐오 사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입시경쟁과 학생을 객체화하는 교육이 차별과 혐오를 공고히 지탱하고 있음도 확인했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학교를 청산하지 않고 페미니즘 교육을 기대할 수는 없다. 진정한 페미니즘 교육은 경쟁과 혐오의 벽을 넘어 모두가 주체가 되는 교육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교사와 연대하는 동시에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발화조차 할 수 없었던 페미니스트 학생과 연대해야 한다.
페미니즘 교육으로 ‘논란’이 된 당사자인 최현희 교사는 경향신문과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이 아이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 교사를 만나고 있다는 심정으로 대화한다.”라고 밝혔다. 이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 평등과 존중을 배울 권리를 박탈당한 페미니스트 학생의 현실을 비춘다. 교사에게 구원받는 대상이자 교육을 통해 바뀌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학생이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는 주체로 인식될 수는 없는 걸까? 비청소년의 관점에서 ‘옳은 것’을 주입하려는 교육문화 속에서 청소년이 스스로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는 삭제된다. 개별 교사의 의지나 역량에 의탁하는 것을 넘어 충분하고 보편적인 학생‧청소년인권 보장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그래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은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동료가_필요합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일방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을 넘어, 평등하게 페미니즘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 마침내 ‘선생’과 ‘학생’ 사이의 위계를 허물고, 모두가 모두에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 내의 다양한 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지 않는 이상 페미니즘 교육은 없다.
▲ [사진3]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운영위원들이 진행한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동료가_필요합니다 인증샷
나는 페미니스트 교사에 연대하고, 침묵하기를 강요받고 있는 페미니스트 학생들에게 연대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할 모든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에게 연대한다. 평등한 학교를 꿈꾸는 페미니스트 동료들의 연대는 확장될 것이며, 혐오는 언젠가 설 곳을 잃을 것이다.
-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