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교사는 ‘왜’ 필요한가?

2017. 12. 16. 23:03틴스페미니즘

페미니스트 교사는 필요한가?



페미니스트 학생에게 동료가 필요하다.”


 지난 826,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하면서 내가 함께 적은 문구이다. 이 해시태그 운동은, 학교에서 페미니즘과 성평등의 문제의식을 갖고 수업을 한 초등학교 교사 최현희 씨에게 학교와 교육청에 집단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등 공격이 가해지는 것에 맞서서 기획되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학교 안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교육을 하지 말라거나 성평등을 주장하지 말라는 일각의 세력은 여전하고, 정부나 학교들의 태도 역시 아직 위태롭다.


 그런데 이 해시태그에 동참하면서 뭐라고 쓰면 좋을지, 나는 한참을 고민했었다. 이 해시태그와 거기에 서려 있는 일부 뉘앙스에 동의하지 않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절대 다수는 아니었지만(내가 본 바로는 해시태그 동참 게시물들의 내용 중 다수는 학교 안에서 겪은 성차별, 성폭력, 교사의 성차별적 언행 등으로 채워졌다.) “페미니즘 교육이 이 사회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라거나, “페미니즘 교육이 없다면 머지않은 미래는 수십만 명의 여성혐오자들로 세상이 채워질 것이다.”, “다음 세대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살기 위해라는 일부 게시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선생님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고 외치는 국회 기자회견문에는 지금의 학교가 미래의 사회를 만듭니다.” 같은 구절이 있었다. 나는 그런 말들에서 드러나는 전제들, 교육관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같은 주장을 하거나 행동을 하더라도, 그 근거나 배경에 있는 생각은 각기 다를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 교사나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쟁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학교교육과 교사, 그리고 어린이·청소년(이하 청소년)에 대한 생각들을 비판적으로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가르치는 것이 미래를 바꾸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글들의 경우처럼, 페미니즘 교육의 의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미래의 우리 사회를 바꾸는 일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사회운동이나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은 미래의 사회를 바꾸는 일이겠지만, 교육과 청소년에 관련해서만 유독 이런 논리가 많이 쓰인다.


 청소년은 바로 지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어른 미래의 시민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교육은 아직 사회 구성원이 아닌 청소년을 미래의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서 페미니스트로 만들기 위해필요하며, 페미니스트 교사는 주체이고 청소년들은 그 교사의 교육을 받는 변화와 구원의 대상일 터이다. 세뇌이니 사상 편향이니 같은 말로 페미니즘 교육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 역시 사실 이런 고정관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되는 대상이 아니다. 바로 지금 사회에 함께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다. 실제 삶과 교육을 분리시키고 사회와 학교를 분리시키는 오랜 관습적 사고방식은, 청소년의 현재의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교육을 일방적인 전수의 과정으로 오해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한, 교육이 미래의 다른 사회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현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변화를 후대로 유예시키는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현희 교사 역시 아이들과 우리는 기실 동시대인”, “청소년의 삶 속에서 이미 차별과 혐오는 현안[각주:1]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학교가 미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사회가 미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학교는 지금의 사회의 일부인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은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에서 공개된 수많은 글들이 증언하듯) 바로 지금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삶에서 성차별과 성폭력과 여성혐오 등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청소년을 시민으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그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학교교육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변화시키고 그 청소년들이 자라서 다른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현실성의 측면에서도 재고해봐야 한다. 청소년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변화하거나 성장하는 수동적인 존재나 백지상태가 아니다. 게다가 청소년은 이 사회에서 격리된 채 학교에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의 경험과 학습은 학교의 공식적 교육과정이나 교사가 기획한 수업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여러 생활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고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게다가 오늘날 청소년들은 일상적으로 PC와 스마트폰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폭넓게 접하고 있다.


 이미 학교교육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관해 참고할 만한 논의가 있다. 매체(미디어) 연구자인 닐 포스트먼은 사라지는 어린이(1982년 나온 책이고, 한국에는 1987년 번역되었다.)에서, 근대의 아동기는 어른들의 세계를 어린이·청소년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으로 유지하고, 학교에서 글자 등을 가르치며 서서히 여러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만들어졌다고 본다. TV 등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이제 더 이상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권위 있고 비밀과 신비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에 닐 포스트먼의 통찰은 더 적확하게 들릴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여성혐오를 습득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도 연결된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으로 청소년을 바꾸겠다는 접근 방식의 성공 가능성은 생각만큼 높지 않다. 게다가 학교교육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하는 과정 자체도 지극히 사회적·정치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학교교육은 공식적이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함께 변해가야 한다. 좋은 교육은 좋은 사회에서만 가능하고, 페미니즘 교육 역시 페미니즘 친화적인 사회에서 가능하다.



교사 개인에 대한 기대의 한계

 

 다른 각도에서도 살펴보자. 왜 우리는 페미니스트 학생이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부모가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상사가 페미니스트 공무원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고,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말할까? 그야 물론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한 교사에 대한 공격에 맞서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에 관련해서 다른 영역에서 불이익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운동이 전개된 건 아니지 않던가?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라는 말은 페미니스트 교사 개개인을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 교사를 성차별 속에 살아가는 학생들을 돕고 구해주고 바꾸어낼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 본래 우리 사회에는 교사가 더 도덕적이고 더 똑똑하고 더 헌신적인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존재이길 기대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페미니스트 교사에 대한 기대도 그런 좋은 교사에 대한 신화와 연결되고 있다. (사소하지만, 굳이 페미니스트 교사가 아니라 페미니스트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나는 그런 뉘앙스를 느낀다.)


 그러나 학교교육 체제 속에서 교사 개인의 자율성이나 권한은 그리 크지 않다. 또한 교사들의 헌신과 도덕성과 전문성에 의존하는 방식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기보다는, 교사가 딱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성평등의 가치를 학교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어야 맞는 것이지 않을까? 사실 페미니스트 교사들 역시 교육과정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가치나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 않은가?


 교육에 한해서 말한다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페미니스트 교사라기보다는 페미니즘적인 학교, 페미니즘적인 교육과정, 페미니즘적인 교육제도이다. 페미니스트 교사나 페미니스트 학생들은, 페미니즘적인 학교의 구성원으로 있을 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해시태그 운동을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교사 양성 과정에 페미니즘을 포함시키라거나 학교성교육표준안을 폐지하라는 등의 요구를 담았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더 확대되어 페미니스트 교사를 지지하는 데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들의 연대를 위해

 

 “페미니스트 학생에게 동료가 필요하다.”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 단지 페미니스트 교사가 먼저 존재하고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을, 학교 안에는 페미니스트 학생들도 있을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페미니스트 학생에게 좀 다른 위치의 동료/동지가 될 수 있고 그들이 연대하여 학교를 바꿀 수 있을 것이기에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담고 싶었다. 또한, 페미니스트 교사들에게는 학교 밖 시민사회로부터의 지지와 연대도 필요하지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학생들의 지지와 연대이기를 바란다.


 페미니스트 교사는 필요한가. 나는 지금의 학교(교사)가 미래의 사회(청소년)’를 만들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지금 교사들도 학생들도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차별과 혐오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모두의 삶에 페미니즘이, 성평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교사들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할 노동자로서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서 역할을 하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어른으로서 청소년들에게 미안해한다거나,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그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달라고 기대하지는 말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다들 차별과 혐오를 겪으면서, 때로는 과오를 저지르고 세상에 순응하면서, 그러면서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맞서서 싸우는 동료 시민으로 만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결국 어른들이란 속세의 경험을 가진 좀 더 큰 아이들에 불과[각주:2]하다는 것이다.


- 공현



  1. 〈[최현희 교사의 학교에 페미니즘을] “야이, 게이 XX!” 어른들이 만약 ‘소수자의 삶’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면…〉, 경향신문, 2017년 12월 1일자. [본문으로]
  2.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김민예숙·유숙열 역, 《성의 변증법》, 꾸리에, 126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