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은 차별주의자다

2019. 6. 27. 16:38Yosm Special

‘좋은 어른’은 차별주의자다


-삽화: 조행하



청소년의 권리는 항상 비청소년에 의해 유예되고, 차단될 위협에 놓여 있다. 비청소년들은 청소년이 직접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실행할 기회를 빼앗는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리기도 하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정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성적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일상을 조각조각 내어 끝없이 감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참정권조차 앗아갔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따라서 비청소년에게 보호받아야 된다는 명목을 내세워서 말이다.


청소년의 책임을 빼앗아 가진 비청소년은, 청소년이 부럽다는 듯 “너희 때가 좋은 거야”라고 비아냥거린다. 이는 청소년을 책임지고 보호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 토로이기도 하다. 이러니 ‘착한 아이’들은 화가 나다가도 “다 우리 잘되라고 하는 거니까”라고 되뇌이며 참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청소년도 비청소년들에게 보호와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왜 그 힘든 책임을 자진해서 맡을까? 스스로 무거운 부담감을 떠안고 청소년을 교정하려, 통제하려, ‘보호’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주의의 한 면에는 청소년이 미성숙하고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 나이주의는, 사람이 어떤 나이(주로 중년)에 가까울수록 그 사람을 성숙하고 판단력이 있는 인간으로 간주하며, 나이에 따라 위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질수록 현명해진다는 것은 비청소년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떡국을 한 번 먹을 때마다 지혜롭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이가 적어도 ‘성숙’하다는 찬사를 받고, 누군가는 나이가 많아도 ‘나잇값을 못 한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청소년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지 않으려면, 어떤 수단으로든 자신의 우위를 증명해야 한다. 착한 어른은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 청소년을 보호하기로 한다. 보호는 선한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이주의는 보호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완성된 인간


청소년은 미성년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미성년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청소년이 완성된 인간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된 어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청소년의 권리를 빼앗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학생인권을 외친 이들이 막으려고 했던 것 중 하나가 체벌임에도, 몇몇 교사들은 여전히 “맞아야 사람 된다”는 명목하에 신체적·언어적인 폭력을 불가피한 교육의 수단이라 포장한다.


이러한 직접적 체벌과 같이 눈에 띄는 수단이 아니더라도, 청소년을 ‘인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청소년은 청소년의 필요를 대신 결정한다. 연애, 섹스, 술, 담배 등과 접촉해 타락하는 것, 자퇴하는 것,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나 취업 준비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한다. 또한, 지금 당장 행복하기를 선택하거나, 비청소년을 ‘나쁜 어른’으로 만드는 청소년의 욕망을 쉽게 평가절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시도가 좌절된 청소년은, 성숙을 위한 새로운 경험 또한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미성숙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중간관리자가 된 여성


가부장제는 여성을 ‘어른’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서, 어린 사람을 잘 관리·감독하면 ‘좋은 엄마’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노키즈존이 논란이 될 때마다, 노키즈존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를 잘 통제하지 않는 ‘맘충’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어린이를 스스로 행동하고 이동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동시에, 어른(미혼 또는 남성)의 여유롭고 조용한 시공간을 지키고자 여성에게 어린이를 통제할 의무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체벌이나 폭력이 벌어질 경우, 어린이를 통제하라는 지시를 내린 자신이 나쁠 게 아니라, 해당 여성이 나쁜 엄마인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긴다.



책임 전가는 누가 했을까


이처럼, 청소년에 대한 규제와 억압은 종종 비청소년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의 음주를 막기 위해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하거나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청소년의 행위에 대한 처벌을 비청소년에게 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청소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다. 청소년의 음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사업주가 아니라 청소년이 직접 처벌받게 하라’는 주장을 내놓아, 정작 청소년의 권리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청소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비청소년에게 민폐를 끼치는 짐,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게 ‘떼쓰는’ 존재로 그려진다. 비청소년에 의해 책임을 박탈당했지만, 그 때문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만다.


청소년이 먼저 책임을 거부하고, 비청소년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비청소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이런 구조를 만들었다. 나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보호주의가 구조의 문제인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행동을 하는 이가 착한 어른인지 나쁜 어른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른 한 명이 체벌하지 않는대도, 다른 어른 한 명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며 ‘사랑의 매’를 들먹인다. 착한 어른과 나쁜 어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어른이 ‘어른’이 되려고 하는 이상, 설득과 회유의 방법을 쓰는지, 눈에 띄는 폭력과 강압을 쓰는지만 다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청소년은 가장 친밀한 비청소년과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억압을 받게 된다. 청소년은 청소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또는 사랑하게 된 비청소년의 체면과 안위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착한 어른 말고, 동등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 어린 사람이 받는 차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어리지 않고 성숙한 사람인지 증명해야만 하는 삶은 존엄과 거리가 있다. 비청소년들은 자신이 청소년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 행동하며 가끔은 실수도 하는, 그래도 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청소년을 향한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를 그만둬야 한다. 차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차별하는 굴레를 끊어내자. 타인을 억압하라는 억압을 거부하자. 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를 거부하기로 결심할 때, 착한 어른이 아닌 동등한 사람이 된다.


- 정다루 기자



이번 24호는 4.9통일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