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7. 15:47ㆍ특별 연재/체벌거부선언
가끔 그런 밤이 찾아온다. 학교로 돌아가는 꿈, 나는 학생이 되어 교실 한편에 앉아 있고, 교사는 학생을 때리려 매를 치켜드는 순간. 중학교를 자퇴했던 해가 2009년이니 내년이면 꼭 10년째가 된다. 꿈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 요소가 하나 있다. 이전에는 소리를 치려해도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다리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날의 밤부턴가, 학교로 돌아간 나는 체벌을 하려는 교사를 향해 ‘안 돼!’ 소리칠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그 매를 빼앗기도 했다. 꿈속에서 소리를 지르다 실제로도 목소리가 터져 나와 잠에서 깨버린 것도 여러 번이다. 평범한 날이었다. 평범하고 평화롭게, 학생들이 맞던 날. 우리 반 담임선생이 유난히 자주 때리던 학생이 있었다. 학교 근처 주공아파트에 사는 아이였다. 그 날은 그 아이가 또 무슨 잘못을 했던 걸까. 다만 그 날은 폭력의 수위가 점점 세져, 다 큰 어른이 아홉 살 아이를 바닥으로 나자빠질 때까지 때리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 장면의 목격자가 된 나는 ‘체벌은 나쁘다’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니 체벌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게 아니라 매 시각마다 일어나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선생들은 자신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때렸고, 말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때렸고, 때론 때리는 게 그냥 버릇이어서 때렸다. 하지만 나는 맞는 것보다 ‘엎드려뻗쳐’가 더 싫었다. 바닥에 엎드려, 엉덩이를 수치스럽게 치켜들고, 머리를 더러운 바닥에 박고, 그 앞에서 위협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선생의 신발을 쳐다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얼굴은 피가 몰려 붉어지고 귀의 고막이 터질 듯 팽팽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꼼짝해선 안 됐다. 직접체벌이니 간접체벌이니 구분하지만, 간접체벌을 가할 땐 가해자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명령만 내리면 된다는 점 밖에 차이가 없다. 그들은 학생들을 주먹으로 위협할 필요도,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줄 건지 상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엎드려’ 세 글자면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모두 지체 없이 머리를 박았다. 아픈 것보다 그게 더 싫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녔을 때 당시는 그린마일리지라 불리는 상벌점제가 도입되던 초기였다. 벌점 받을래 맞을래, 하는 질문이 떠다녔다. 한 번 몸 대주고 나면 끝나는 걸, 많은 학생들이 맞는 걸 택했다. 중학교를 자퇴하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더 이상 체벌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컸다. 고통을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 고통이 ‘너를 위한 것’이고 ‘교육’이며 ‘사랑’이라는 헛소리에 설득당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때릴 수 있어서 때린 것이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보다 체벌을 하는 게 자신에게 편리하니 때린 것이다. 나는 중학교를 자퇴한 것이 내 생에 가장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길을 걷다가, 일을 하다가, 또는 누군가와 대화하다 그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은 못 잊었다. 학교로 찾아가 그들을 발견한 후, 뺨을 올려붙이는 상상을 한다. 당신이 나에게 얼마나 큰 폭력을 저질렀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상을 한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잠시 시간이 얼어붙는다. 여러 해 품어온 환상이지만, 지금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간대도 그 선생들은 떠나고 없을 것이다. 예전에 학생인권운동을 했던 한 사람을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맞는 게 일상이었던 그는, 졸업식 날까지도 구령대에서 체벌을 당했다고 한다. 모든 학부모들과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당했다고 한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후유증으로 살아가는 삶이 있다고 했다. 내 몸의 주권을 빼앗겼던 그날들, 무너지고 나서야 인간의 존엄성이란 게 무엇인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그 때 그날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 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