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1. 20:15ㆍ틴스페미니즘
교육부가 2015년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은 ‘여자는 무드에,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등 왜곡된 성인식과 잘못된 성폭력 대처법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에 교육부와 여성가족부는 8월 중으로 성교육 표준안을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울시 위례별초등학교에서는 방과후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한 교사가 온갖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 학교 안에서의 성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이에 대해 학생과 교사가 자신이 경험하거나 진행했던 성교육의 문제점과 어려움에 대해 쓴 기고글 4편을 연재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진행한 <청소년이 말하는 성교육 수다회> 기록을 통해 청소년이 진단하는 왜곡된 성교육의 폐해와 청소년이 진짜 원하고 필요로 하는 성교육은 어떤 것인지 제시한다.
교직경력 13년차에 처음 성교육 수업을 한 교사 이야기
5년차 이하
내가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부터 성교육은 연간 15시간 이상 의무사항이었다. 하지만 많은 ‘~교육’이 그렇듯, 성교육 역시 서류에 ‘성교육’이라고 적기만 하면 되었다. 열심히 서류에 쓰고 형광펜으로 그었다. 마치 수업연구를 한 것처럼 가짜로 메모를 쓰기도 했다.
5년차~10년차
그나마 있던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의무조차 2010년 보건교과가 신설되고 나서는 보건교사에게 넘어갔다. 학생 간 혹은 교직원 간에 갈등이나 폭력사안이 발생하더라도 성과 관련된 일이면 내 손을 떠나 보건교사에게 이관되었고 보건실에는 ‘성고충상담실’이라는 푯말이 하나 더 붙었다. 성교육은 나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보건교사도 못할 일이었다. 간호사로 양성된 사람들이 갑자기 ‘교사’로 호명되며 수업에 투입되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한 보건교사는 정말 유능한 분이었는데 수업에 있어서는 초보였다. 워낙 일처리가 꼼꼼하고 경력도 오래된 분이라 감히 수업에서 초보일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는데, 어느 날 보건수업이 너무 힘들다고 담임교사가 교실에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다(학생들 옆에서 무섭게 분위기를 잡고 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했다. 나로서는 수업 시수가 느는 일이었지만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고 우리 반 학생들 수업태도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막상 수업에 들어가 보니 학생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성폭력 예방이 주제인 수업에서 그 교사는 실제 사건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귀에 꽂혔다.
“그렇게 이 케이스는 종결되었어요.”
수업에서 쏟아지는 구린 접근, 이를테면 여학생의 바른 옷차림 운운하는 내용도 힘들었지만 ‘케이스’와 ‘종결’이라는 말이 온 교실 천장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와 한자 범벅인 수업에 강제로 앉아있는 건 학생들에게 너무 큰 고역이다. 하지만 보건교사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어린이의 언어를 훈련받지 못했고 성교육이나 보건교육은 수업모델도 교육적 접근도 연구가 너무 빈약하니까.
10년차~
그래서 국가성교육표준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용이 정말 정말 X같이 구린 게 치명적이지만 국가성교육표준안은 성교육 수업시간이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확보되도록 하고 성교육에 대해 보다 연구하는 학교 현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보건교과 공개수업도 많고 지역마다 성교육 연구학교도 생겼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해. 내가 맡은 학년은 성교육이 정말 정말 정말! 필요한 학년이었다. 언어적 성폭력은 일상적이었고 강당 수업에서 몇몇 학생은 커튼을 부여잡고 섹스장면을 연출하는 놀이를 즐겼다. 피해자가 속출했고 2학기가 되자 ‘진짜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교사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교과서에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성교육에 대한 필요였다.
당시 보건교사는 고민 끝에 성별에 따라 분리해서 수업을 할 수 있게 수업시간을 조정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섞어서는 성을 이야기하기에 자신이 없다고 했다. 2개 학급씩 묶어 여학생끼리, 남학생끼리 수업을 하기로 했다. 그럼 보건교사와 수업을 하지 않는 나머지 학생들은 어떻게 하나? 학년에서 회의를 하다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내가 학생들과 성교육 수업을 해보겠다고. 그래서 나는 3교시에는 여학생들, 4교시에는 남학생들과 성교육 수업을 하게 되었다. 교직경력 13년차에 처음 말이다.
첫 성교육 수업
먼저 낱말카드를 만들었다. 갑자기 하게 된 수업이라 예쁘게 만들지는 못했다. 들어간 낱말은 ‘질, 음모, 음경, 유방, 성장기, 위생, 몽정, 사정, 고환, 외음부, 포궁, 자궁, 사랑, 변성기, 여드름, 게이, 생리, 동성애자, 성호르몬, 체모, 음란물, 난자, 포경수술, 대안생리대, 정자, 레즈비언, 발기, 트랜스젠더, 생식기, 동의, 브래지어’였다. 수업시간 중 절반은 학생들에게 성기결합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할애했고 절반은 낱말카드를 이용해 모둠별로 설명하기 게임을 했다.
당황했던 것은 학생들이 성기결합섹스를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야동도 많이 보고 자위를 하는 학생도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과 느낌과 경험을 표현할 언어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포경수술을 대부분의 남학생이 이미 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학생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이 ‘포경수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생리를 달마다 하지만 ‘질’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내 설명에 단어 단위로 공감하고 반응했지만 다 받아들이기엔 내가 쏟아내는 언어는 너무 많고 빨랐다. 설명을 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무례한지를.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체할 듯 급하게 쏟아내는 방식이 아닌, 보다 준비되고 정성들인 설명을 들을 권리가 이들에게는 있다는 것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학생들 앞에서 섹스를 입에 올리겠다 생각했을 때 들던 걱정, 이를테면 학생들이 야유를 보낸다거나 소란스러워지거나 하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현실과 전혀 달랐다. 학생들은 매우 집중하고 흥미롭게 내 설명을 들었고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설명을 끝내고 난 후, 카드를 가운데 쌓아놓고 자신의 순서가 되면 한 장씩 열어 설명하는 게임을 했다. 게임의 규칙은 두 가지. 웃거나 장난스럽게 설명하지 않으면 1점, 정보를 제대로 설명해도 1점. 간단한 게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부족했다. 조금 하다가 마쳐야 했다.
점심을 먹고 5교시가 되었다. 우리 반 학생들이 그 게임을 더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 그러자고 했다. 아까와는 달리 여학생과 남학생이 섞여서 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카드를 열고 말하는 게임이었는데 학생들은 즐거워했다. 그건 좀 놀라웠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거의 제대로 설명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설명해야 하면 당황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학생들은 즐거워했다. 집단적으로 호기심과 흥미에 적셔진 공간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부분 카드를 연 사람이 설명하기 보다 주변에서 한 단어씩 거들어주어 협력한 설명이 만들어졌다. 오히려 성별이 섞이자 게임이 역동성을 띄기 시작했다. 한 여학생은 모둠을 오가며 대안생리대에 대해 수십 번 설명했다. 사정과 발기에 대해서는 학생 전원에 가깝다시피 이해하기 어려워해서 나 역시 모둠을 오가며 계속 설명해야했다. 그러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총 4시간 동안 학생들이 성교육 수업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수업 후
수업 다음 날 한 여학생이 내게 와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생님, ㅇㅇㅇ가 저보고 생리한다고 놀려요.”
갑자기 교실 전체가 조용해졌다. 지목당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화가 났다. 교사로서 난 화가 아니었다. 우연찮게도 나는 생리 중이었다. 소리를 질렀다.
“나도 생리하고 있어요. 지금 내가 생리하고 있다고요. 나보고 놀려 봐요. 왜 나한테는 안 그래요? 생리가 뭐가 어때서요?”
교사는 늘 학생에게 필터를 거쳐 말한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압박받는다. 하지만 저렇게 지른 나의 일갈은 필터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교실에서 나는 교사가 아니라 여성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우리 반의 여학생들과 같은 그룹에 속해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교실은 늘 교사/학생으로 나눠져 있는 공간이었는데 그 순간 학생들과 내가 같은 여성으로 동질화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낮은 자세로 학생들과 평등한 관계 맺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노력해왔지만 이 순간, 처음으로 내가 학생들과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나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그들과 연대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학생들은 내게 귓속말로 생리통 때문에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반 교실은 적어도 생리라는 말을 발화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아직 화장실에 갈 때 생리대를 숨겨서 가져가긴 하지만 엎드려 있는 여학생이 생리통 때문이라고 하면 성별에 상관없이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확실히 만들어졌다. 한 학생은 발기된 상태의 페니스의 상태에 대해 쉬는 시간에 와서 질문했다. 반가웠다. 이 학생이 내게 질문을 한 것도 반가웠지만 내가 그 학생의 눈빛에서 좀 더 다양한 것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가웠다. 만약 4시간의 성교육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발기된 페니스를 말하는 학생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뒤집어씌울 수 있을까. 하지만 4시간의 성교육 시간을 통해 그도 나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성교육 수업을 해보기 전까지 나는 학생들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섹슈얼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학생의 눈빛에는 성적 호기심도 반짝이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에 대한 경이와 신비로움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얼마나 놀라운가. 몸의 일부분만 부풀고 커지고 딱딱해져 액체가 발사(?)되는 그 메커니즘이 말이다. 더욱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성적 호기심을 긍정하는 태도였다. 맙소사, 이런 게 교실에서 가능하다니.
새로운 학기를 마주하며
이 글을 쓰면서 학생들에게 4시간동안 했던 성교육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았다. 좌절스럽게도 학생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기억 안나요’였다. 내심 재밌었다나 인상적이었다 정도는 기대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욕심이다. 4시간 정도로 어떤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한두 번의 성교육으로 뭔가가 바뀌고 해결될 거라는 건 판타지 중에서도 저질판타지다. 성교육이라는 것은 결국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다루는 교육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해내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기본을 확인하고 결을 맞추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하려 하는 태도는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시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토양이 될 순 있지만 씨앗이 되진 못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토양이 중요하니까, 2017년에는 저 수업을 좀 더 확장해서 해보고 싶다. 자신의 몸과 경험의 변화를 설명하는 것에 집중했던 게임이었는데 올해는 성감대나 쾌감 등의 말도 포함해서, 그리고 좀 회차를 나누어서 진행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이 성을 좀 더 안전한 상황에서, 지지가가 있는 상황에서 탐색할 수 있도록 좀 더 긴 시간을 들여서 말이다.
한편으로 내 삶과 나의 정체성을 더 날것으로 드러내보고 싶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에서 벗어나 내가 학생과 같은 높이에서 연대할 수 있을 가능성을 좀 더 찾아보고 싶다. 어쩌면 언젠가는 학생들과 함께 성폭력생존자 발언대회를 교실에서 열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이런 거예요, 저건 저렇게 해야 해요.’라는 수업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과 쾌감, 지향과 정체성을 학생과 교사가 발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교실. 학생과 교사 간의 지식적 위계가 분명한 수학수업이나 과학수업에서는 이루기 힘들 수 있지만, 성교육에서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가냘픈 희망이 있다. 가장 내가 나로 학생들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으로 성교육을 만들어내는 데에 만약 성공한다면 학생들과 나의 관계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은 그토록 정치적이니 말이다.
― 미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