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전쟁들

2017. 5. 3. 20:47극한직업청소년


 나는 '여중'에 다니는 청소년이자 페미니스트이다. 삶을 옭아매는 차별발언들과 열심히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학교에 난무하는 온갖 혐오발언과 억압에 지쳐 십 분도 채 안 되는 하굣길을 좀비 마냥 비척비척 걸어와 이불 위에 드러눕고는 한다. 속에서만 지르던 비명을 휴대폰을 받고서야 겨우 SNS에 쏟아내고, 좋아하는 가수의 영상을 실없이 웃으며 몇 번이나 돌려보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잠에 든다. 6시 반을 알리는 알람을 듣고 깨어나면 열심히 충전한 에너지를 도로 소진하러 갈 준비를 한다.



1. 조신해야 하는 일상


 복장검사를 하지 않는 날 교문에는 늘 체육교사 두 명이 서 있다. 우르르 쏟아지는 학생들 위에 겹겹이 쌓이는 "예쁜 미소로 하루를 시작해야지." 따위의 목소리는 나를 웃을 수 없게 만든다. 눈치가 보여 입꼬리만 슬쩍 올리고 지나가기 일쑤다. 나는 학교가 싫다, 학교에 가는 것도 싫다. 아침부터 일어나 그 꽉 막힌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놀리는 활동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들 앞을 스쳐 지나갈 0.1초 동안 잠깐 웃는다고 학교가 덜 억압적이며 덜 강제적인 곳이 되는 것도 아닌데, 피곤한 표정을 숨기고 교문에 있는 두 분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짓는 미소는 누구를 위한 미소일지 생각하고는 한다.


 개학한지 약 한 달, 벌써부터 귀에 익을 정도로 들은 '예쁜 미소'라는 말. 나는 그 예쁘다는 말도 불편하다. 나는 그들의 눈에 굳이 예뻐 보이고 싶지 않다. 우리 학교가 '남자중학교' 였으면, 아니 최소한 공학이라도 되었으면 예쁘다는 소리를 굳이 붙였을까 의심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우리는 예쁠 필요가 없다. 더욱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교문을 통과해야 할 이유도 없다. 매일 아침이 지나갈 때마다 듣는 그 소리는 나를 더 지치게 만들 뿐이다.



2. 조심하거나 죄송하거나



 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 화장을 하거나 과자 같은 간식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혐오발언을 지적할 때조차 그렇다. 수업시간에 대놓고 인터섹스와 트랜스젠더를 희화화하고 편견을 재생산한 선생님이 있었다. 저번엔 화장은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첫 혐오발언을 들은 날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 했었다. 그래도 두 번째는 달랐다. 사실 그 사이에 많은 고민이 있었긴 했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더 이상 묵인하면 안 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 차마 대놓고는 말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난 후 그분을 따라가서 지적을 했었다.


 나는 그때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죄송하지만'을 붙였는데, 사실 좀 후회하고 있다. 나는 틀리지 않았는데, 옳지 못한 건 그 사람이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공손하게 말했을까? 혹여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지 않고도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



3. 긴장하며 사는 삶


 맞다, 나는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또 누가 혐오발언을 할까 주시하고 있다. 하루의 3분의 1을 보내는 곳에서 계속 힘을 주고 있는다는 것은 정말로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그리고 혐오발언이 나오면 거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고, 지적을 했으면 지적을 한 대로, 지적을 하지 않았으면 안 한 대로 뒤이어지는 고민들과 생각들이 있다는 것도 날 답답하게 한다.


 나는 언제쯤 학교 안에서 마음을 놓고 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싶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져 바쁜 날이다.


- 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