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7. 12:14ㆍ칼럼-청소년의 눈으로
"청소년의 언어문화는 한국어와 한글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것으로 지목된다"
“좆이나 뱅뱅이다!” 트위터를 하다가 ‘요즘 애들은 개념이 없다’ 같은 소리를 보고 자연스레 욕이 튀어 나왔다. 나는 주변 사람들도 나도 인정하는 욕쟁이다. 씨발은 한숨이고, 개새끼는 애칭이다. 최근에 영화 〈아수라〉를 봤더니 ‘좆이나 뱅뱅’, ‘이 씌빨럼이!’가 입에 붙었다. 그렇다. 나는 어른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비속어와 인터넷 용어를 남발하는 ‘요즘 애들’이다. 오타쿠로서 ‘덕질’을 하거나 트위터를 하면서 각종 업계 용어(?)를 쓰기도 하니, 평균적인 청소년들보다도 그런 ‘언어 파괴’가 더 심할지도 모른다.
언어 파괴와 관련해서 언론에 난 기사를 보면 어른들이 ‘언어 파괴’를 걱정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정도 같다. 하나는 욕설이나 비속어 사용이다. 그런 기사에서는 꼭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친구끼리도 편하게 일상적으로 욕을 섞어 가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또 다른 하나는 신조어나 인터넷 용어, 줄임말 등이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환경 속에서 새롭게 탄생하고 유통되는 여러 말들이나 의도적으로 문법이나 맞춤법을 벗어나는 말들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이건 청소년의 언어문화는 한국어와 한글을 ‘파괴’하고 ‘더럽히는’ 것으로 지목된다. 청소년의 언어문화는 그들의 미성숙함을 증명하는 사례로 거론되고,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다른 존재’임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된다. 이런 비난은 청소년 혐오 현상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통 자라나는 청소년을 걱정한다는 이야기가 따라 다닌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한민국에는 이미 지역, 세대, 계층, 직업 등에 따라서 사용되는 많은 다른 언어가 있다. 그런 것들은 사투리, 은어, 농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표준어’를 벗어나는 많은 언어문화가 모두 언어 파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청소년보다도 더 습관적으로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많은 어른을 보았다. 예를 들어 운전 중일 때라든지……. 하지만 욕설을 유발하는 자동차 운전이 언어를 더럽히고 있다는 지적은 본 바가 없다. 유독 청소년의 언어문화가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청소년의 언어를 못 알아듣는 비청소년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이유이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청소년은 ‘바람직한 문화만을 교육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청소년의 언어문화가 주목 대상이 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미래의 사회를 짊어질 주역’이기 때문에 청소년의 언어문화는 더욱 기성세대가 관리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인식이 매우 많이, 그리고 분명하게 깔려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청소년도 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청소년은 그들 나름의 다양한 경제적·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회 전반의 언어문화와 상관없이 청소년의 언어문화만을 ‘교정’하고자 하는 이러한 접근법은 한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욕설이나 비속어, 은어 등도 엄연히 언어생활의 일부인데 어째서 청소년에게는 특정한 언어, ‘표준어’만을 쓰게 해야 한다고 믿는지도 따져 봐야 한다. 여기서 청소년이 ‘배워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고학력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이다. 학교교육이 이처럼 한 사회 안에서 부유하고 고학력자인 계층의 문화를 더 우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가르친다는 비판은 교육사회학에서 오래 전부터 연구된 문제이다. 이는 특정한 가정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더 학교교육에 잘 적응하게 해 주는 한편,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라는 구별을 만들어 내 사회에서의 차별을 정당화해 준다. 현재 청소년에게 행해지는 교육은 표준어를 강조하고 비속어나 은어를 배격하는 교육이며, 이 교육은 언어의 우열을 규정하고 있고, 이에 따라 (대체로 고학력의 부모를 두고 공부를 잘할) 표준어를 잘 구사하는 이들이 더 바람직하고 우월하다는 인식과 엘리트주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언어 환경과 사회적 위치
그렇기에 청소년의 언어문화가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에 대해서 더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로 비청소년과 다른 청소년 언어문화의 특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청소년은 어째서 그토록 비속어나 신조어, 줄임말 등을 많이 사용하는지 의아해 할 수있다. 청소년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은밀한 소통을 위해,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 은어를 사용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구한 전통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요즘의 청소년은 정도가 더 심하고 방식도 과거와 어딘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 것 같다. 소위 ‘초성체’나 ‘외계어’를 대표로 들면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청소년이 사회화가 덜 되었다거나 폭력적인 대중문화에 많이 노출되어서, 혹은 또래 문화라는 식의 설명보다 좀 더 성의 있는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고 연구도 더 필요하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볼 때 최근 청소년의 언어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언어 환경의 영향이 크다. 수만 년,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언어의 주가 된 것은 소리 언어였다. 문자는 소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언어 사용은 말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활자 기술이 발달하고 보급되면서 문자 언어의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생활의 필수 역량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일상의 소통은 대부분 말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컴퓨터와 온라인을 통한 소통의 확대, 그리고 최근에는 휴대전화와 그에 이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글로 하는 소통, 문자 언어 사용량이 일상생활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비청소년들은 왜 청소년들이 자꾸 말을 줄이고 초성만 쓰느냐며 투덜댄다. 그러나 이는 언어 사용 환경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음성으로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를 말하는 것과 “세젤예”를 말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를 자판으로 친다고 하면 무려 14타나 차이가 난다. 문자 메시지 길이가 한정되어 있다면 글자 수를 줄이는 것은 더욱 필수적이다. “인정”을 “ㅇㅈ”이라고 하거나 “어디?”라고 묻는 것을 “ㅇㄷ”라고 하는 등 초성으로 대화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뜻만 통한다면 그게 훨씬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일상회화에서 문자를 사용하는 비중이 더 큰 언어 환경에 돌입했음을 전제해야 최근 청소년의 언어문화를 설명할 수 있다. 흔히 지적되는 온라인 서브컬처의 문제, 인터넷 신조어 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 환경이 최근 이십여 년 사이에 단절적으로 변화한 상황을 반영한 현상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언어 환경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요즘 청소년’을 외계인 보듯이 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언어 환경의 문제로 본다면, 과거의 언어 규율은 음성 언어가 일상생활의 주를 이루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며 이러한 규칙 역시 문자 시대에 맞게 조정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규범은 앞으로 이러한 언어 환경에서 살아갈 모든 사람들이 논의하여 합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사회적 위치도 중요한 부분이다. 청소년의 언어문화는 청소년이 얼마나 비청소년의 사회와 통합되어 있지 않은지, 그리고 공적인 참여의 기회가 없는지를 방증한다. ‘표준어’나 교양 있는 언어는 왜 필요한가? ‘아름다운 우리말 수호’ 같은 알맹이 없는 말은 빼고 효용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여러 계층과 지역의 사람들이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일은 보통 공적인 의사 결정이나 토의의 장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소년은 중요하고 공적인 결정의 과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주장을 할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교양 있고 공식적인 언어를 익히는 것은 청소년에게는 학교 시험 외에는 별 쓸모도 없는 일이고, 이를 학습하더라도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화할 기회를 얻지도 못한다.
청소년 말고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자. 은어는 주로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문화를 가진 직업계나 문화 집단에서 잘 발달한다. 그리고 공개적이고도 공적인 의사 결정과 대화의 자리에 참여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하층 계급, 빈곤층일수록 비속어 등을 많이 사용한다. 비청소년들 중 상당수는 일상생활이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욕설·비속어 등을 사용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용하는 ‘언어 세트’를 훌륭하게 교체하곤 한다. 그들은 욕설과 비속어가 ‘나쁘니까’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공적인 자리에 참여할 자격과 위신이 있음을 입증하고, 많은 사람들과 장벽 없이 소통하기 위해서 특정한 상황에서만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교양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청소년은 그래야 할 때가 별로 없을 뿐이다.
해결책은 교육이 아니다
청소년에게 언어(순화)교육을 해야 한다거나,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바른 말 고운 말을 쓰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무슨 바른 언어 사용을 위한 캠페인 같은 것도 연례행사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변화한 언어 환경에 대한 인식도 희박하고 청소년이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청소년에게 특정한 언어문화를 가르치기만 하면 ‘교정’이 될 거라는 일방적인 인식만이 담겨 있다.
하지만 청소년의 언어문화가 다소 다르게 발달한 원인이 청소년의 잘못이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결책은 헛돌게 마련이다. 청소년의 언어문화를 교정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변화한 언어 환경에 맞는 유연한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언어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어교육은 우열과 교정의 개념이 아니라, 풍부하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개념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이 공적인 자리에서도 충분히 잘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갖추길 원한다면,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보장하고 각종 사회적·정치적 장에 함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먼저다. 나도 평소에는 욕쟁이지만, 이렇게 공적인 글을 쓸 때는 욕을 자제하고 그럴듯한 말들을 쓸 줄 안다. 그리고 그건 결코 내가 언어순화교육 같은 것이나 한글날 캠페인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치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