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고 해서 달라진 게 뭔데 - 평등 없이는 보호도 없다

2016. 7. 23. 09:29Yosm Special




△ 사건의 피해자들을 '아이들', '너'로 호명하고 반말로 부르는 신문 기사 헤드라인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우리 아이들이 국가다.’,

세월호 사고가 없었다면 투표했을 아이들’.


 최근 아동이나 청소년이 피해 당사자였던 기사의 제목들이다. 아동, 청소년 피해자가 많이 생긴 사건에서 대다수의 언론의 반응은 위와 같았다. 피해자를 온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동정하는 논조가 주를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이름과 사진을 공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대중들의 반응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해자가 가졌을 꿈과 미래가 어른들의 잘못으로 박탈되었기에, 어른으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반응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러한 반응들은 피해 당사자가 비청소년인 경우와 선명하게 다른 양상을 띤다. 피해당사자의 인권과 2차 가해 방지를 위해 피해자의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사진이나 피해 당시 모습, 실명은 언론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과 같이 피해당사자가 청소년이 포함된 사건에서 이런 원칙은 대부분 무시되는 경향을 보였다. 피해자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당사자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우리 아이들이라고 호명하고 반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를 주체로 보지 않는 서술방식 또한 비청소년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 아이들아 미안하다와 같은 선언과 호명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피해자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호받기만 하는 제3자의 위치로 밀어냈다.



'어른'들의 시선만 세상에 떠돌아


 이와 같은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흔히 언급되는 요인은 책임감이다. 사회에서 아동,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분류된다. 앞날이 창창하고 많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감이 대중들의 슬픔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청소년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도리어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 또한 존재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에 재학중이였던 이혜지씨는 다시 봄이 올거예요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무엇보다 사고나고 어른들한테 되게 실망을 많이 했을 때, 어른들 만나는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게교실 존치 문제도 그래요. 저희 의견을 듣긴 들어요. 그럼 반영을 하는거냐? 그것도 아니래요. 그럴거면 왜”.


세월호 사건 당사자였음에도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발언권과 결정권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사건당사자인 청소년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미안하고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시선만 세상에 떠돌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에 참여했던 김한률씨 또한 616일에 있었던 다시 봄이 올거예요청소년활동가와 다시 읽기에서 다음과 같이 발제했다.


 “사람들은 청소년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나서서 운동하려고 하면, 언제나 그들의 등 뒤에 우리를 세웠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특하긴 한데, 여기 있지 말고 공부를 해야지.’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청소년들은 세월호 사건을 우리 일로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니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을 그어놓고, 우리를 지켜줘야 할 존재로 명명 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문제의 당사자에서 제 3자로 추락해버렸다.”


 이는 직접 나서서 행동하려는 청소년에게조차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시선이 걸림돌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청소년들은 언제나 피해자로서 불쌍하게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부당함에 맞서 싸우려 하면 너무 정치적이다’, ‘지금 당장은 네가 어찌 할 일이 아니다’,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청소년이 처한 현실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 미안하다고만 외치지 말란 말이야!


청소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청소년 안전의 시작이다


구의역 사고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실한 19살의 청소년이 희생된 사건이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반응은 많았지만, 실제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은 그에 비해 매우 적었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인터뷰한 한 특성화고 현장실습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맘대로 그만두는 걸 못 하겠더라구요. 왜 그러냐면 일단 학교에서는 더 이상의 중개를 해주지 않아요. 물론 개인취업으로 나가면 되겠죠. ‘일할 곳은 또 있으니까 뭐 어때이런 각오이기도 하고 이게 사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기말고사가 끝나야 나갈 수 있다는 거. 그 두 달 동안 학교에서 계속 눈칫밥 먹으면서 계속 있을 순 없으니깐. 둘째로는 그동안 돈을 못 벌잖아요. 그래서 한 번 그만두면은 그런 구조예요.” (2015910일 인권오름 특성화고 현장실습을 아시나요?)


이와 같은 조건에서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수백번 해도 소용이 없다. 특성화고 현장실습 노동자는 일터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할 수 없다. 반영은커녕 퇴사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취업률 경쟁을 위해 특성화 고등학교는 현장실습 노동자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 어렵도록 만든다. 이런 행태가 가능한 이유는 물론 학교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낼 수 있도록 만드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큰 효과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를테면 최근 현장실습 노동 문제의 해답으로 대두되고 있는 노동인권 교육이 그렇다. 청소년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노동인권을 얼마나 알고 있냐와 관계없이 노동현장은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아이들이 죽어서 미안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배제된다. 희생자는 청소년인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어른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안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청소년이 왜 배제되었으며 이 배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이 청소년의 안전을 말하기 위한 시발점이다.




[또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