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신문 요즘것들

혐오에 갇힌 청소년

2018.09.18 20:46 - 요즘것들 아수나로

혐오에 갇힌 청소년

청소년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 삽화: 라망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게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씌워져 있다. 사람들은 대개 청소년을 어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무력한 피해자로 대하면서도, 때로는 언제 범죄와 비행을 저지를지 모르는 충동적이고 불안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한편 청소년은 그들의 미래의 꿈과 희망이기도 하다. 때문에 학업 등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는 미래로 유예되었고, 미래만이 강조된 나머지 청소년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편견들은 동시에 작용하며 청소년의 삶을 옭아맨다. 하지만 그 청소년이 만 19세가 되는 순간, 대우는 180도 달라진다. 왜 사람들은 청소년과 비청소년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청소년혐오 때문이다. 청소년혐오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알아보자.

청소년, ‘우리’와는 다른 사람?

우리 사회는 청소년에게 여러 고정관념을 씌운다. 한 집단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로 취급하고, 편견과 왜곡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타자화라고 한다. 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특히 타자화되기 쉽다.

‘요즘 청소년은 어떠냐’는 질문은 흔하다. 하지만 ‘요즘 비청소년은 어떠냐’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집단으로 묶어서 볼 수 없는 개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타자화가 일어날 때, 타자인 청소년은 개별적인 주체로 인식되지 못하고 공통된 정체성으로 묶이게 된다.

‘요즘 청소년은 어떠냐’는 질문은 청소년을 사회와 동떨어진 집단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청소년 역시 비청소년과 같은 사회의 구성원임에도 그들 역시 사회 문제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인식은 부족하다. 일례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표현 뒤에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는 어른이며, ‘우리 아이들’은 그것을 적용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이 타자화는 한 집단을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



둘로 나뉘어 비교당하는 청소년

우리 사회에는 청소년에 대한 기대와 편견이 존재한다. 그 틀에 부합하는 청소년들은 칭찬을 받고 모범적인 아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비난의 표적이 되고 불량아로 취급받게 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청소년혐오가 다른 혐오와 공유하는 특성 중 하나이다. 잘 알려진 예시로 ‘성녀·창녀 이분법’은 여성혐오의 대표적인 전략인데, 여성을 남성들의 잣대에 맞추어 성녀와 창녀의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녀는 더욱 순종시키려 하고 창녀는 더욱 깎아내리려 하며, 결론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A는 한국의 흔한 학생 청소년이다. 학기 초, 학교에서는 기초조사서를 나누어 준다. 특기는 글쓰기로, 취미는 독서로 적어 내지만 사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들이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책상에 엎드리고 싶지만 교탁 앞 교사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A는 그렇게 일상생활부터 인간적인 면까지, 자신의 모든 면을 모범생으로서 가꾸어 나간다.

B 역시 A와 같은 학교의 학생이다. 하지만 A와는 달리 늘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며 치마 길이가 짧고, 성적도 좋지 않다. 교사들 사이에서 그런 B는 ‘불량한 학생’이다. B는 학교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지만 계속해서 악평을 받는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면화한 B는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가 우울하다.

수업 시간, 둘은 서로 다른 교실로 향한다. 자습하는 공간도, 담당 교사도 각자 다르다. A는 좋은 성적 등으로 각종 혜택을 받는 반면, B는 성적을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흔하다. 학교에 방문하는 대학생들과의 만남 행사도, 과학 체험 캠프도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갈 수 있다. 교사들은 A의 반에서 B의 반 학생들의 불량한 행실을 언급하며 비교하기 일쑤이고, A는 B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함에 자기 자신을 더욱 모범생으로서 가꾸게 된다.

이와 같이 청소년들은 평가의 대상으로서 비청소년에 의해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그들은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역할 행동을 잘 따르면 보상을 주며, 그것을 무시하는 이들을 깎아내리며 제재를 가한다. 결론적으로 청소년이 ‘순종적’이라는 평가를 칭찬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지속적인 비교를 통해 불안감을 심어 주어 청소년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이러한 이분법의 전략이다.

실제 삶을 들여다보자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난민 문제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교도와 무신론자를 죽이고 테러와 범죄를 일으키는 무슬림 난민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사회 곳곳에 퍼져 있으며 난민을 추방하려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로 쓰인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알려진 모습을 빼고 나면, 사실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소년혐오에서도 난민혐오와 비슷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청소년들과 가까우면서도 멀리 살아 온 비청소년들은, 생각보다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알고 있지 않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요즘 아이들의 생활을 신기한 듯이 다루는 게시물이 공유된다. 주로 십대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소위 ‘급식체’ 라고 하는 신조어, 청소년들이 주로 하는 게임과 화장 문화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정보는 대개 청소년 당사자보다도 청소년의 생활을 관음하듯 소비하고자 하는 비청소년에 의해 생산, 유통된다. 이런 속에서 실제 청소년의 삶은 쉽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혐오는 무지와 공포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청소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이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편견에서 벗어나 그들의 참된 모습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 푸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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