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2. 19:11ㆍ칼럼-청소년의 눈으로
*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응모색을 위한 토론회(2016.09.20, 광주)>의 발제문을 다듬어 다시 싣습니다.
* 용어 설명
청소년 : 청소년의 정의가 각 법마다 다르지만, 이 글에서는 청소년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연 19세 미만의 사람을 ‘청소년’이라고 부른다. 단 사례에 따라서 대상이 특정된 경우 ‘어린이’, ‘16세 미만의 청소년’ 등으로 부른다.
비청소년 : 연 19세 이상의 청소년이 아닌 사람을 이른다. ‘성인’, ‘어른’등의 용어가 ‘사람은 특정한 나이 및 생애주기를 지남으로써 성숙해진다’는 편견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해 단어를 바꾸어 쓴다.
1 | 2 |
노키즈존 카페 - “안전사고와 고객들의 불편으로 인해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합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폭행, 절도...무서운 10대” |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합시다” “순수한 동심” “나이가 어린데 이런 것도 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아이들에게 깨끗한 세상을 물려줍시다” |
위의 둘로 나누어진 표현 중 어떤 것이 청소년에 대한 혐오표현일까요? 아마 첫 번째는 비교적 많은 분들이 평소 혐오표현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가요? “왜 이게 혐오표현이지?”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도 계실 것 같아요.
여성혐오가 공포, 멸시와 동시에 숭배의 이면을 가지고 있듯, 청소년혐오 또한 공포와 멸시 뿐 아니라 사랑, 동정, 동경 등의 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혐오의 시각으로 볼 때 청소년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철없이 대드는 ‘비행청소년’과 순수하면서도 의젓한 ‘개념청소년’입니다. 여성을 김치녀와 개념녀로 이분하는 것이 남성중심적 사회에 만연한 남성의 시각이듯이, 비청소년 중심적 사회는 비청소년의 시각으로 청소년의 성숙도를 판가름하며 이분합니다.
어쩌면 다른 소수자혐오에 비해 생소하고 낯선 개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운동에서도 청소년혐오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주장한 것이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익숙하던 것들을 돌아보며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1. 보호를 위해 배제하다 - 미성숙의 굴레
‘노키즈존’을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키즈존의 필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어린이가 떠들고 뛰어다니며 다른 손님들의 휴식을 방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어린이들이 ‘민폐’를 끼치는데도 부모들은 어린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무개념 부모’, ‘맘충’이니 아예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공간이 성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어린이가 이용하기 불편한 문제, 연소자의 사회화가 단지 부모와 가족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문제, 자녀를 일부러 통제하지 않는 부모보다 자녀와 함께 편히 머무를 공간이 점점 적어져 곤란을 겪는 부모가 훨씬 많다는 문제는 부각되지 않습니다. 또, 과연 어린이가 다른 나이대의 손님들에 비해 항상 더 시끄럽고 질서를 안 지키는 걸까요? 제 경험으로는 중년 남성들이 시선폭력, 성폭력을 가해하는 경우를 훨씬 많이 겪었는데요.
최근 pc방에서 만 15세 이용가 게임인 오버워치를 하고 있는 초중등 학생을 경찰에 신고하는 행동이 ‘정의구현’이라며 칭송받고 있습니다. ‘초딩’, ‘중딩’들이 없어 ‘클린’해지겠다고 기뻐합니다. pc방에 경찰이 출동한 사진, 초중등 학생이 오버워치를 하는 모습이 적발될 시 곧바로 컴퓨터를 끄고 퇴실시키겠다는 경고문이 pc방에 나붙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신고가 너무 잦아 경찰관들이 곤란을 겪을 정도라고 합니다.
게임의 심의 등급이 적절한가는 논외로 치고,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게임사용을 신고하는 것이 왜 ‘정의구현’이며 그로인해 pc방이나 게임이 ‘클린’해진다고 말하는 걸까요? 게임 상에서 성희롱과 언어폭력을 일삼고, pc방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주로 남성인 후기 청소년과 비청소년이라는 것을 아마 모두가 알고 있을텐데요.
카페나 식당에 ‘음주자 출입금지’나 ‘30~50세 남성 출입금지’가 나붙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술을 마신다고 모두 난동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중년 남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른 손님에게 성폭력적인 언행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니까요.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특정한 사람들을 일상적인 공간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왜 청소년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왜 청소년은 더 쉽게 격리의 표적이 될까요?
청소년의 구매력보다 청소년과의 격리를 원하는 고객들의 구매력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린이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민과 비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에 더해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그들을 격리하는 혐오의 논리입니다.
‘급식충’, ‘급식이’라는 초중고등학생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습니다. 시기상 무상급식이 주요 이슈로 대두된 이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입장불가 행사에 ‘급식충이 없어 클린하겠다’, 청소년임을 밝히는 게시물에 ‘급식충은 끼어들지 마라’, 다소 난해하거나 작품성을 인정받는 웹툰의 댓글에 ‘급식들은 이런 거 이해 안 간다고 안 본다’는 등의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청소년의 소비를 부모의 노동에 기생하며 사치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르는 말인 ‘등골브레이커’, 청소년들이 부모, 교사 등 주변과 겪는 갈등 등을 포괄적으로 병리화하는 ‘중2병’, 소녀다움을 탈피하고 주체적으로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여성청소년을 멸칭하는 ‘룸나무’ 등을 청소년혐오 표현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기저에는 초중고학생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리는 집단’이라는 흔한 혐오논리와, 보다 더 미성숙하리라는 편견, 그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합니다.
[참고문헌 : 쥬리, <청소년혐오란 무엇인가>, 오늘의교육 34호(2016.09-10)]
또한 청소년의 배제는 일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청소년에게 행해지는 보호는 대개 통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위험의 맥락과 근원을 살피거나 청소년 스스로 위험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해할 가능성이 있는 매체와 장소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청소년의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포르노의 문제는 나체와 성기의 노출, 섹스 장면의 적나라한 묘사보다도 여성에 대한 도구화와 그 생산과 소비 방식의 비윤리성에 있습니다. 몰카 등 디지털 성폭력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청소년도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보호법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청소년의 성에 관련된 키워드 검색과 포르노 사이트 접근을 제한합니다. 이는 알아야 할 성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까지 차단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포르노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의 문제가 아닌, 단지 개인이 보지 않아야 할 것으로만 교육합니다. 위험에서 격리함으로서 오히려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청소년은 비청소년에 비해 기존의 사회질서에 익숙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차적으로 사회를 살아온 시간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에 더해서, 보호자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거동하기를 원할 만큼 성장한 후에도 학교 등의 기관과 가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도록 요구받으며, 비청소년과 대등하게 관계 맺고 의견을 나눌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통제하고 비청소년과의 교류와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청소년의 성숙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상대가 동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동등한 대접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2. 청소년을 사랑한다고? - 무서운 비행청소년과 기특한 개념청소년 사이
작년 11월 수능 무렵, 광주 충장로에서 한바탕 청소년 선도 캠페인이 있었습니다.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광주시교육청이 진행했습니다. ‘수능 후 청소년들의 심리적인 해방감에 따른 비행과 탈선을 사전에 예방하고 범사회적 청소년 선도 분위기를 조성해 주변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라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비행과 탈선을 예방하자는 말은 참 하기 좋고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 비행과 탈선이 실재하는 삶에 멀찍이 떨어져서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요. 청소년의 비행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에는 어른에 대한 반항, 음주, 흡연, 탈가정, 절도, 폭행, 성관계, 성노동 등이 뭉뚱그려져있습니다. 그들을 ‘비행청소년’이라고 뭉뚱그려 부를 때, 각자의 삶의 다양한 맥락은 소거되고 문제 행동만이 남아 그 개인이 교정 대상이 됩니다.
술과 담배는 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감안해 개인의 결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호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정신적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사춘기라는 단어가 봄으로 은유하는 성(性)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라는 설에서도 알 수 있듯, 청소년의 성욕은 지극히 당연하며 성관계는 당연한 욕구의 실현입니다. 왜 이것들이 유독 청소년에게는 엄격히 금지될까요. 앞서 말했듯이 위험으로부터의 격리는 보호로 기능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탈가정을 한 청소년은 어떤 보호도 없이 자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노동은 몇 안되는 선택 가능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쉼터에서는 청소년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누구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청소년을 사랑한다는 말,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라는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을뿐더러 억압으로 작용합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미래의 주인으로 기대 하는 청소년에 대개 비행청소년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개인의 모자람과 도태의 근거가 되고, 사회의 문제는 가려집니다. 도태되지 않고 보호망 안에 남기 위해, 체벌 등의 폭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청소년들은 ‘개념청소년’의 틀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갑니다. 동심, 순수, 밝음, 창의적, 용감함 등 청소년에게 원하는 모습을 투영하고 기대하는 것 역시 같은 방식의 억압입니다.
미래의 주인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기만적인지요. 멀쩡히 지금 살아있는 사람을 미래에야 주권을 행사하며 살아갈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가정과 학교 등의 일상 속에서부터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빼앗기는 저변에는 아직 참여할 수 없는 존재라는 폄하가 깔려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에게 ~~한 세상을 물려주자’와 같은 구호 역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서 호명할 뿐 함께 정치의 영향을 받고 운동을 해나가는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3. 청소년혐오를 조금씩 지워나가기
청소년혐오의 뿌리에는 청소년을 동등한 인간이자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바라보지 않는 인식이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도 혐오 논리를 내면화 해 더 어린 청소년이나 다른 청소년들을 억압하기도 합니다.그런 행동이 오히려 용인되고 때로는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인정받기도 하니까요. 청소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청소년들에게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거나, 스테레오 타입 청소년의 모습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나이가 기본적인 서열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평등한 관계를 맺는 것은 많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2병’ 등의 단어를 쓰지 않는 것에서부터, 또 곁에 있는 청소년 한 사람을 청소년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일상 속의 청소년혐오를 문제제기하고 극복해나가는 활동을 함께 해나가고 싶습니다.
- 밀루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광주지부)
청소년혐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 오늘의 교육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