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스페미니즘] 소녀답지 않을 권리

2016. 6. 30. 19:09틴스페미니즘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건 추하지만

자연스럽고 예쁜 화장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틴스페미니즘]은 여성청소년이 여성이자 청소년으로서 겪는 

복합차별을 다루는 페미니즘 에세이 릴레이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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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이 연필이 연필다운가요?”라고 물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아마 아리송한 표정을 짓거나, 어이없어하며 웃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일지도 모른다. “연필이 그냥 연필이지, 연필다운 연필도 있어요?” 하지만 연필이 아니라면 어떨까? 연필 대신에 여성 청소년을 넣어 질문한다면? 대부분 사람은 아마 어렵지 않게 얼마나 여성스러운지, 얼마나 학생다운지 판단해 낼 것이다. 여성 청소년도 그냥 그녀 자신일 뿐인데.



"화장하고 치마 줄이는 게 인권이야?"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칙이 바뀌었다. 학생주임 교사는 강당 마이크를 차지한 채 개정된 교칙이 얼마나 까다롭고 엄격한 잣대를 가졌는지를 자랑스레 떠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복 치마에 자를 들이대거나 클렌징티슈를 들고 교실로 쳐들어오는 학생부 교사의 모습은 낯설지 않게 되었다. 교사들은 복장 불량으로 벌점을 받는 것에 대해 학생들이 스스로 동의 서명을 하게 했고,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마이를 안 입어서 걸렸던 날, 반쯤 충동적으로 서명을 거부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들고 학생부실로 갔다. 그때 교사 한 명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화장하고 치마 줄이는 애들을 위해 교칙까지 바꿔 줘야 돼? 그게 인권이야?”라던.

 

  무슨 복잡한 의미가 담긴 말은 아니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화장하고 치마 줄이는 것은 전혀 학생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학생답다는 건, 검고 쭉 뻗은 머리카락,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릎까지 오는 긴 교복 치마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일 테고.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 법한, 모호하고 약간은 우습기까지 한 기준이지만,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꽤 귀찮게 군다. 학생답지 않은 복장을 했다는 명분으로 교문 앞에 세워두는가 하면, 낯선 사람으로부터 어린 학생 같아 보이는데로 시작하는 훈계를 듣게도 한다. 심지어 그런 꼴로 다니다가 무슨 꼴을 당해도 싸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학생다운 게 뭐라고?

 

 


여성스러움을 추구하더라도 학생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 두 가지를 합한 소녀다움은 더 까다롭고도 이상한 것이었다.


그린 이 : 쓰르




여성다움보다 갑갑한 '소녀다움'


  나는 사실 학생다움의 정의에 그럭저럭 근접한 외모를 갖고 있다. 학생다움보다는 게으름뱅이다운 외모라고 할까? 일 년 중 최소 300일은 민낯에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다녔으니, 다행히도(?) 학생답지 않다는 비난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답게 해 드린다고 모두 나를 가만히 둔 것은 아니다. 여성스럽지 않은 데다, 여자 비슷한 모습이라도 갖추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름대로 여러 일을 겪었다. 또래 집단에서 나는 항상 남자로 분류되었고, 여자인데 꾸밀 줄을 모른다고 혼난 적도 있다. 심지어는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또는 쌍꺼풀 수술만 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예뻐질 것이라는 위로까지(나는 내 작은 눈을 사랑하는데!) 받으며 지내 왔다. 그들에게 여성스럽지 않은 여성인 나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나서서 도와주고 고쳐줘야 할 존재였다.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려 한 적도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성스러움을 추구하더라도 학생다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 두 가지를 합한 소녀다움은 더 까다롭고도 이상한 것이었다. 외모에 너무 신경 쓰면 안 되지만 체중과 피부 관리는 기본적으로 잘해야 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건 추하지만 자연스럽고 예쁜 화장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더라도 여성스러운 모양이 따로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진이 빠졌고, 결국 원래의 귀찮음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상 그 누구도 디즈니나 지브리의 여주인공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더 갑갑한 옷이었고, 나를 끼워 맞추려는 발버둥을 그만두었을 때의 후련함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더 학생다워질 필요도,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여성스러울 필요도 없다는 걸, 나는 그냥 나다울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화장하고 치마 줄이는 건 인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변한 것은 나뿐이었다. 소녀다워지라는, 단정하고 예쁜 여학생이 되라는 목소리는 파리처럼 계속 윙윙거리며 나에게도, 다른 모든 소녀들에게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있다. 그리고 변명한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다고, 한두 마디 하는 것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한 마디 때문에 매일 거울 앞에서 학생다움과 여자다움 사이의 외줄 타기를 해야 한다. 체중계 바늘이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또는 오늘 옷이 너무 과한지, 아니면 자연스럽고 괜찮은지에 따라 그 줄 위에서 날아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이게 예민한 걸까? 화장하고 치마 줄이는 건 인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걸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여자다움, 청소년다움이 아니라 나다움을 기준으로, 제멋대로 꾸미게 되기를!

 


쓰르

게으름이 제 아이덴티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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