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의 체벌거부선언문

2018. 12. 7. 15:57특별 연재/체벌거부선언

- 두려움

체벌이라고 하면, 벌써 십수년 전 일이지만 중학교 과학 수업 중 정기적으로 돌아오곤 했던 일종의 즉문즉답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과학 교사가 학생 1명 1명에게 그 전 시간까지 배운 것 중에 아무거나 질문을 하고, 5초 안에 대답을 못 하면 손바닥을 맞는 시간이었다. 대답을 더듬거리거나 한 음절 틀리기만 해도 손바닥을 맞았다.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질문을 받고 5초 안에 대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뇌를 작동시켜야 했던 시간, 그 두려움과 조바심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 시간만 되면 교실 안의 공기는 마치 손에 잡힐 듯 목에 걸릴 듯 팽팽해지곤 했다.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을 리는 없으니 그저 내가 숨을 제대로 못 쉴 만큼 긴장했던 것뿐이겠지만.

우스운 것은 반 이상의 학생들은 체벌을 피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맞고 말겠다는 자세로 임했고, 나는 어떻게든 한 대도 안 맞고 넘어가 보려고 열심히 외운 끝에 한 질문 한 질문 클리어할 때마다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는 점이다.(그래도 종종 삐끗해서 매번 하나씩은 틀리곤 했다.) 끔찍한 것은, 뭐 그런 방식으로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려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교사는 나름 열의 있는 좋은 인품의 사람이었고 스스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으리라는 점이다. 나는 지금도 ‘체벌’이라고 하면 그 교사의 즉문즉답 시간과 더불어 그 교사가 수업 시간에 상습적으로 자는 학생에게 쓰레기통에 물을 받아 끼얹은 사건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나는 그 교사에 대한 미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아마 그것이 사적 감정 없는 ‘교육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에 가까운 형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끔찍함과 내가 기억하는 충격, 두려움의 시간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이없어했던 체벌들 ― 2학기 개학을 했으니 정신 차리고 공부하잔 의미에서 전원 1대씩 매를 맞자던 영어 교사라든지, 체육 시간에 집합이 늦었다는 이유로 반 학생 전원을 ‘엎드려뻗쳐’ 하게 했던 체육 교사라든지 ― 보다도, 그 중학교 과학 교사의 체벌이 더 ‘아프고’, ‘굴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건 그 교사가 이상한 사람이거나 불합리한 사람이라 벌어진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체벌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그 교사가 바라는 대로, 학생이 지정된 범위를 달달 외우고 벌벌 떨며 5초 안에 대답을 쥐어 짜내도록 통제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여전히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조금 울먹이고 싶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딱히 그 교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체벌 이야기를 하면 체벌을 가한 사람의 선악을 판별하고, 그 체벌이 효과적이고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묻곤 한다. 감정적이진 않았는지, 심하진 않았는지, 체벌을 당한 사람이 맞을 만한 잘못을 했는지, 반성을 하게 만들었는지 등……. 그러나 체벌을 한 사람이 선량하고 합리적인 사람인지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체벌에 의해서 어떠한 결과를 얻든 그 과정 자체가 폭력에 굴복한 경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순종하고 두려워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체벌이 아니라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제도화된/허락된)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정부에서는 체벌의 원칙적 금지와 교사들의 자제를 요구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체벌이 너무나 흔한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폭력을 가한 학교 교사, 학원 교사, 택견 도장 사범, 그리고 아주 드물긴 했지만 부모까지도, 모두 미워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나 다른 사람들이 겪은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고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들은 그래도 되는 사회였으니까 그런 것일 뿐임을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선 안 되는 사회가 되긴 했던가? - 감옥보다도 못한 점

[우선 학교는 감옥이다. 어떤 점에서 학교는 감옥보다 더 잔혹하다. 예컨대 감옥에서 교도관들과 교도소장은, 당연히 읽고 쓸 수 없다면 교도관도 소장도 되지 못했을 테지만, 재소자들에게 읽고 쓰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무엇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때리거나 달리 벌을 주지도 않는다. 감옥에서는 적어도 간수들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재소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는, 끌리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주제로 강연하면서 들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다. 그대가 감옥에 있다고 가정하자. 간수들이 그대의 신체에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대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생각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게다가 간수들은 다른 재소자들에게 얻어맞거나 잔혹한 짓거리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그대를 보호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서상복 옮김, 《부모와 자식 어른과 아이 길동무로 살아가기》, 연암서가, 64-65쪽 내가 살면서 중·고등학교 적과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은 병역거부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적이다. 외출과 통신이 금지된 것만 더해진 (자유형(刑)의 본질이 자유와 사회적 관계의 박탈이니 그 부분이 중요한 것이긴 하겠지만) 기숙사 고등학교 생활 같았던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저러한 글을 쓴 20세기 초반보다야, 감옥도 학교도 모두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 부분에서 한국의 감옥은 한국의 학교보다 낫다. 감옥에서는 수용자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거나 폭력을 가하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제한되어 있다. 구속구를 사용하거나 생활환경이 가혹한 징벌방에 수용자를 보내는 처벌이 있으나 일단은 불가피할 때 절차를 거쳐서 집행된다. 물론 밉보인 수용자에 대해서 편법적이고 불공정하게 구속구를 사용한 신체적 처벌을 내리는 경우 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발각되면 감옥 직원이나 소장이 규탄과 처벌을 받으리란 점은 확실해서, 정당한 사유와 절차를 밟으려 하고 가혹한 행위는 은폐하기 위해 애쓴다.

반면 청소년의 경우에는 어떤가. 청소년에 대한 폭력, 체벌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2015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가정, 학교, 학원 등에서 여전히 체벌이 벌어지고 이를 딱히 감추려고 들지도 않는다. 문제가 돼서 처벌을 받으면 그게 오히려 재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청소년인권이 너~무 잘 보장돼서 문제이고, 체벌이 없어져서 요즘 애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소리나 나오려나. 〈세계인권선언〉도 〈대한민국 헌법〉도, 권리 중에서 존엄성과 차별 금지의 원칙 다음에 신체의 자유가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권리로서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존중이 이런 지경이니 우리 사회가 아직 청소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체벌 근절부터 확실하게 이루어 내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 권리의 입법

〈아동복지법〉은 만18세 미만 아동에게 그 보호자(친권자, 교사를 포함하여 보호·양육·교육할 의무가 있는 자, 업무·고용 등의 관계로 사실상 아동을 보호·감독하는 자)가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을 금지한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학생을 지도할 때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경기도, 광주광역시, 서울특별시, 전라북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는 체벌 등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렇게 법적으로 한국은 체벌 금지 국가다. (만18세가 된 고등학생에 대한 일부 체벌에 대한 법리적 공백이 없지 않으나 이 문제를 생략한다면.) 그러나 체벌이 금지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학교 체벌은 금지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도 제대로 금지된 상황은 아니지만, 가정 체벌을 포함한 모든 체벌이 금지된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 반은 넘을 거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의식 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국민의 48.7%는 체벌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식 조사 중 최초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비율이 50%를 넘긴 고무적인 결과이긴 했으나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체벌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우울하다. 많은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가 그렇듯, 체벌은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허용되고 있다.

“권리라는 것은 결국 ‘양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영도 지음, 《눈물을 마시는 새 2》)이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권리는 권리가 되지 못하고 법이 사문화된다. 따라서 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는 그 법이 실제의 삶을 규율하는 선이 되고 뿌리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체벌 금지를 대대적으로 선언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청소년은 참정권이 없고 ‘아직’ 시민이 아니며, 체벌 금지를 선언했다가는 친권자·교사 등의 반감만 살 거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비록 체벌의 발생 빈도나 강도는 줄어들고 있지만, 체벌 근절을 기대하기에는 전망이 어둡다. 2016년 국가인권위 조사에 의하면 학교에서 ‘직접체벌을 받았거나 목격한 경험’은 중학생 29.5%, 고등학생 27.1%, ‘간접체벌을 받았거나 목격한 경험’은 중학생 35.1%, 고등학생 36.3%나 된다. (사실 이렇게 체벌을 ‘직접’, ‘간접’ 나누는 것도 지극히 체벌을 가하는 사람의 관점이다!) 이 비율이 학생인권조례 시행 지역에서도 20-30% 선인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체벌을 지지하는 바탕이 되는,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혐오는 더 강해지는 경향마저 관찰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체벌거부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언이 결국 청소년의 신체의 자유,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 체벌을 당하지 않을 권리, 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을 권리를 입법하는 데 한 몫 하는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입법의 완결은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표결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나 역시, 학교에 인권교육이나 강의를 가서, 체벌의 흔적을 목격하거나 증언을 듣더라도, 굳이 나서기엔 부담스러워 같이 욕이나 하고 넘어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와 함께 노력하거나, 적어도 학교에 문제 제기라도 해야겠다.

비록 나는 청소년은 폭력을 당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나, 나보다 여러 모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나의 분노나 짜증을 표현할 때 물리적 위협이 되는 방식이나 폭력적 방식을 사용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때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반성한다고 했지만 다시 한 번 잘못을 곱씹는다. 체벌거부선언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일이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나와 우리의 습관을 바꾸기 위한 실천이 되기를 바라면서.


-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