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가지 않은 3가지 이유

2018. 11. 12. 18:55특별 연재/2018 나의 대학입시거부

내가 대학에 가지 않은 3가지 이유



 나는 올해 대학에 가지 않았다. 어른들은 순서가 바뀌었다며 얼른 대학에 가라고 재촉한다. 공부에는 때가 있으니 뭐든 대학 간 뒤에 하라고. 방황은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


 나는 왜 대학에 가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생각하고 정리해본 3가지 이유를 적어 내려가 보겠다.



1.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온갖 시험들이 나를 가차 없이 평가하고 채찍질 할 때마다 들었던 부끄러움, 불안, 주눅. 끊임없이 대학생의 삶을 부풀려 듣는 것, 또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약간의 체벌과 낙오자 취급, 서로를 부럽게 혹은 낮추어 보는 시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종이 위에 적혀진 숫자에 하루 기분이 달라지는 익숙한 감각들. 우리 모두 많든 적든 겪었던 흔하디흔한 경험을 기억한다. 절벽으로 마구 몰아놓고는 대학이란 외길로 등을 떠미는 입시의 몰인정함을 기억한다. 내 안에 아로새겨진 감정을 되새기며 나를 채찍질하던 교육에 화가 났음을 보여주고 싶다. 나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울분은 미래에 대한 불안,  당장 앞에 놓인 시험, 타인의 시선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움츠러들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교육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 나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대학을 거부하는 것을 택했다.



2. 입시에게 빼앗겼던 무언가에 대한 박탈감을 해소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다. 


 내가 정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나의 목표가 되어버린 대학진학이 싫었다. 한 때는 그저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기부에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더 앞선 미래를 위한 스펙쯤으로 치부되었고 나를 계속 증명해야하는 곳에서 나는 증명하고 증명하다가 지쳐버렸다. 내가 진실하게 대할수록 더 힘들어졌다. 고등학교 재학 내내 나는 대안교육에 대한 열망이 컸다. 내 주위의 누구도 내게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또 내 세계의 누구도 대안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지루하게 반복되는 학교생활에 대한 염증, 다른 걸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카펫 아래 괴물처럼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갔다. 모든 상황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학교 안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대학에 가기 위한 배움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나는 다른 걸 더 재미있게 배우고 싶었다. 탈학교할 결심을 했다. 내 안의 뭔가가 소진되어 더 이상 의욕이 들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밀었던 관성으로 학교를 다녔다. 시험기간에 드는 자책이 끔찍하고 내가 나로 있지 못하는 것에 환멸이 났다. 그러나 결국 여러 가지 문제로 탈학교 하지 못한 채 고3이 되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친구들을 외면하고 채근하는 부모님을 외면하고 불 켜진 학교를 외면하고 피하고 피해서 결국 돌아와야 했을 때 좌절했다. 그저 글을 쓰며 버티면서 나는 자주 폭발했다. 내가 보아야 했던 풍경이 고개를 돌리면 보았던 학교 창가 속 똑같은 풍경뿐이라는 게 서글펐다. 우리는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또 한 해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좁은 책상 테두리만큼의 공간만 가지면서 딱 그만큼의 공상이 허용된다. 나는 사회가 나 역시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빼앗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경험과 고민, 그리고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감정을 빼앗겼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제야 어떤 것을 빼앗겼는지 어렴풋이 알 거 같기에 박탈감이 들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었을까? 나는 선택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내가 도둑맞는지도 모르면서 도둑맞기를 방어할 수 있었을까?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끌고 다니던 사회적인 압력에서 벗어나 내 길은 내가 정하겠다는 외침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잡고 내 인생에서 어떤 일의 순서와 때를 스스로 정하고 싶다. 



3. 대학 가지 않는 삶을 고찰하기 위함이다.


 하루는 야자를 하다가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친구와 잠깐 나와서 이야기를 했다. 너는 왜 대학에 가니? 현실적인 이유라고 했다. 취업하기 위해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너는 대학에 안가면 무얼 하며 밥 벌어 살 거냐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대학에 가는 것이 취업하기 위해서라면 대학에 안 갈 생각을 하는 나는 현실적이지 못한 걸까?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을 생각해서 대학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


 고2때 아는 어른들에게 대학에 안가는 삶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선생님은 내게 대학에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면서 하루살이로 알바해서 지낼 거냐고 되물었다. 하루살이가 되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가지 않는 것은 하루살이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대학이 필요하면 대학에 가라. 맞는 말이다. 나는 마지막에 결국 대학 원서를 넣었다. 대학거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붙으면 열심히 다닐 의향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권유 받았을 때 나는 정말 대학이 필요했을까. 1년이라도 뒤쳐질까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대학이었을까. 나는 우리가 대학과 입시경쟁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서는 더 여유가 필요함을 알았다. 학교에서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기에 우리의 미래는 너무도 불안정하고 막막했다. 대학 이외의 다른 길도, 희망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세상에서 자랐기에 불안했다. 대학을 간다, 가지 않는다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조금 알 거 같다. 대학이라는 선택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소들이 중첩되어 우리를 압박한다. 그래서 더더욱 대학에 가지 않는 삶에 대해 말해야 한다. 사회에서 대학 가지 않는 삶은 고졸성공신화와 편견, 불안 등에 가려져 더 많은 논의와 고찰이 오가지 않는다. 나는 대학 가지 않은 채로 대학 가지 않는 삶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다.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현실적이지 못한 것, 하루살이가 되어 버리는 것,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예 얼토당토 않는 얘기가 돼버린다. 내게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건 이런 의미를 가진다. 내 삶의 주도권을 다시 잡는 것, 나의 고민과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것, 나와 우리를 억누르던 사회를 향해 반항하는 것.


 어느새 스무 살의 매듭도 거의 다 지어간다. 올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갔다. 달콤했다. 이 달콤함을 맛보고 나니까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왜 진즉 나오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나는 무엇을 불안해했던 걸까. 여러 질문이 오간 뒤에 내게 학교에서의 경험이 경미한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겐 여러 번 학교와 입시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고 그건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나는 그 때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을 느껴야했다. 울 것 같은 기분은 내게 남은 상처의 흔적이었다. 다행히도 몇 번 울었고 그래서 이 글을 조금 속 시원하게 쓸 수 있다. 학교에 다니면서 하는 고민들을 쓸모없지 않다. 그 불안들은, 대학 가기 전에 잠깐 앓는 감기 같은 게 아니다. 이것들은 나를 이루고, 언젠가는 내가 덮어둔 질문들에 답해야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대안적 삶에 대한 상상은 그 속에 내가 있을 때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 곳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대학거부는 이미 내게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앞으로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며 다른 풍경을 상상해봐야지.


- 성윤서


투명가방끈은 수능시험이 치뤄지는 11월1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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