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신문 요즘것들

더는 버리지 않기 위해서

2018.11.11 18:52 - 요즘것들 아수나로

더는 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기 위해 버려온 것들


 얼마 전에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합디다. 자기는 원래 꿈도 있고, 가치관도 있고, 약자에 대한 감수성도 있었다고. 그래서 처음엔 그걸 다 등짐으로 지고 달렸다고. 그런데 짐이 너무 무거워 차츰 지쳐갔고,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 달리고 있나 흘금 보니 짐 하나 없이 홀가분하게 달리기만 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따라잡으려면 자기도 하나씩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이 길목에서 꿈을 보따리 채 버리고, 저 언덕에서 가치관도 버리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버려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버리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기에, 버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그랬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참 순진했습니다. 버리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버려야 하는 줄을 잘 몰랐습니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랬습니다. 그걸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좌고우면하지 말라며 경주마에게 눈가리개를 씌우듯, 앞만 보고 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얼마간 버렸습니다. 특히 가치관을 가장 많이 버렸습니다. 애초에 짐짝을 매고 출발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보며, 매정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본받아야지 했습니다. 성적 높은 학생들만 모아다 자습시키는 특별실을 없애야 한다며 선생님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친구. 그 친구 앞에선 좋은 일 한다고 추켜세워 줬지만 속으로 그랬습니다. 유난이네, 별 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둘 변하는 나를 보고 있는 게 비참해서, 이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괴롭고 아팠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게, 마치 맨살이 뜯겨져 나가는 듯 아팠습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내가 버리는 이게, 꿈이며 가치관이며 인간성이며 하는 이것들이 짐보따리가 아니고 살점이구나. 나의 일부구나. 이걸 버리는 건 나를 버리는 거구나. 이걸 버리면, 나는 죽는구나. 



강제된 죽음


 거부선언자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투명가방끈이 지금껏 활동해온 사진들을 봤습니다.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스펙 쫓다 꿈 잃은 좀비들’ 이라고 적힌 피켓. 2011년 거부선언을 앞두고 ‘입시좀비 스펙좀비 할로윈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좀비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좀비는 산 듯 죽어있는 사람이고 죽었지만 죽은 티를 내지 않으려 까뒤집어진 눈으로 나다니는 이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물어야 살지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이들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실은 안으로 죽어가고 있는 나. 영락없는 좀비였습니다. 


 실은 당연합니다.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내가 살고 말고는 안중에 없이 틀 지워진 체제였으니 말입니다. 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수요하는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대학의 얼굴을 하고, 자본의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섭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 앞에 서기까지 무엇을 버려야 했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폐로 치환 가능한 능력이 우선되고 그 외에 주체를 위한 인간적인 가치는 홀대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도된 가치. 인적 자원으로서 교환 가치를 고양하는 게 삶의 목표를 대체합니다. 상품이고자 하면 인간이기를 그만둬야 하므로, 존재론적 죽음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나는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 안 하겠습니다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목숨줄은 그들이 잡고 있습니다. 인간 자원을 수요하는 그들이 체제의 중심인 까닭에 수요자의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언표는 곧 현실적으로 살아남기를 포기하겠다는 얘기가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죽지 못한 낙오자들에게 따라오는 건 패배이고 고립이며 결국 죽음입니다. 소위 ‘명문대’에만 수시 원서 6장을 쓴 다른 친구에게 대학입시거부가 어떠네, 제도가 어떠네 하는 얘기를 했더니 곧바로 이런 대답이 돌아옵디다. 나도 다 안다고. 그런데 살아남으려면 별다른 수가 없다고. 뭐라도 빌어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학은 생존의 문제인 겁니다. 현실적 죽음이 두려운 대부분의 사람에게 대학은 선택이 아닌 강제입니다. 


 더욱 서러운 것은 교환 가치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인간 자원을 수요하는 그들의 언어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태입니다. 각고로 노력한 끝에 얻는 대가가 참 값지지 않느냐, 대학입시가 어떻고 하는 건 죄다 패배자의 변명이다, 하는 말을 어떤 친구는 서슴없이 내뱉곤 합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 말을 늘어놓는 사람의 눈에서 불안을 봅니다. 주인 잃은 시선을 봅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자신을 잃어서,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었기 때문에. 지배적인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 외에 눈을 쓰는 방법을 배워본 바가 없으므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시선이 다수를 이룰 때 이데올로기는 공리의 자리에 오릅니다. 공리, 반증 불가능한 자명한 진리. 왜 대학에 가느냐는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리. 제가 살아온 곳이 그 공리의 한가운데였습니다. 공리가 얽히고설킨 공리계에서 공리를 거스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반역이었습니다. 공리는 논리와 이성의 얼굴로 반역자를 나무라기에 감히 거스르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공리에서 허여된 선택지는, 상술했듯 존재론적 죽음 아니면 현실적 죽음입니다. 어디로 가나 죽음뿐입니다. 강제된 공리 안에 삶은 없습니다. 



삶의 감각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 해방의 길이 영 없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존재론적 죽음, 현실적 죽음, 죽음, 죽음, 죽음……. 죽음뿐인 막다른 길.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러다 우연히 대학입시거부자들의 목소리를 접했습니다. ‘대학입시거부선언.’ 나는 대학 앞에서 죽네 사네하고 괴로워 안달인데, 대학입시거부선언.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막힌 생각이 트이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알아봐야지 싶어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를 사서 읽었습니다. 부러 치장하지 않고 거부선언자들이 진실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기에 공감되고 와 닿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한데 학교에서 그 책을 읽고 있으면 꼭 지나가다 누구 하나는 물어봅니다. “대학 안 가려고?”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대학 안 간다는 친구가 있어서요. 그 친구가 이거 한번 읽어보라고 하더라구요.” 그렇다고 대학 간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 숫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애써 숨기긴 했으나 묘한 해방감은 들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숨길 정도로 남들 하지 말라는, 금기시된 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는 해방감. 내가 내 삶의 방향타를 굳게 잡고 있기에 가능한 희열. 진지하고 무겁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인 자유의 감각. 


 분명 거부선언자들은 그런 자유의 감각에 걸맞는 다른 삶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존재론적 죽음이냐, 현실적 죽음이냐하는 갈래길 앞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지 끙끙댈 것이 아니라 함께 삶으로 가자는,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가자는 연대의 손을 거부선언자들은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단 말뿐 아니라 온몸으로. 공리 자체를 거슬러 적극적으로 외부자가 되자고. 공리가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게 두지 말자고. 함께하자고. 왜 ‘그들’이 우리의 삶을 좌우할 힘을 갖고 있느냐고 반문하며 그들로부터 우리의 삶을 꾸릴 권리를 다시금 가져오자고 제안했습니다. 강요된 선택에서 거부선언자들은 이미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게 달리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억울한 요컨대 대학입시거부는 생존의 문제였던 셈입니다. 


 대학입시거부선언으로 선택이 수렴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짜놓은 삶의 원리를 내면화하거나 묵시적으로 동의하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주체 중심의 삶 원리를, 삶 방식을 창안해나가지 않는 한 영영 그들에게 끌려 다니며 삶을 잃고 말테니 말입니다. 다행히도 거기서 어떻게든 탈주의 선을 그리는 나름의 길을 대학입시거부로 아주 조금은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거부선언을 앞두고 살아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좀비마냥 죽은 듯 살아서가 아니라 생생하게 피가 도는 인간으로 살아남아서는 어떻게 살아남게 됐는지 그 경과를 쓰고 있습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이때껏 살아온 삶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선택을 내렸기에 낯설고 두렵습니다. 이 자유의 감각이, 삶의 감각이 참 낯섭니다. 혹여 또 앞으로 걸어다나가 또 다시 이런 갈래길을 만나게 되었을 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지레 겁먹어 자유로부터 도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감내해야 할 불안은 이겨내고, 억울한 불안에는 맞서며 그렇게 살아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는 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제 와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하나씩 다시 주워봅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 내가 버려야만 했던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던 것들을. 그러면서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복기합니다. 내가 참 많이 버려왔구나. 이것들을 버리기 전의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구나. 


 고등학교 갓 들어와서 쓴 글을 최근 다시 읽어봤습니다. 글에 치기가 어려 창피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여운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눈에 띄는 문장. ‘(이 학교에서) 인간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 괴물도 기계도 아닌, 인간으로 살며 인간으로 성장하리라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네 사람이 한 방 쓰는 빽빽한 기숙사 방구석에서 만년필 글씨로 또박또박 쓴, 그 글을 보며 새삼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버려온 나머지 본래 무엇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던 겁니다. 고등학교 들어왔을 적부터 순 매정한 사람이었던 줄로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를 찾아갑니다. 


 버리기는 쉬웠지만 버린 것을 찾기까지는 먼 길을 돌아와야 했습니다. 뜯겨나간 살점을 다시 붙이는 듯 까다롭고 고통스런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함부로 버리고 온 것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더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망정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모두 이고 가겠습니다.  


 쉽지 않음을 압니다. 꿈, 가치관, 인간성, 약자에 대한 감수성, 이걸 다 가지고 가려면 적잖은 힘이 들 터입니다. 가다가다 힘에 부쳐 주섬주섬 꺼내다 또 다시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후회하고 후회하다 결국엔 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후회뿐 아니라 후회하지 않도록 다시 일어서는 법을 압니다. 뜻하지 않게 버리게 된다면 그걸 다시 줍고 또 주워서 가겠습니다. 그래서 종국엔 무엇 하나 버리지 않도록, 일어서는 법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기까지 대학입시거부라는 오늘의 선택이 미래의 저를 견인해가기를 소망합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 대학입시거부선언에 참여합니다. 


- 김정래



투명가방끈은 수능시험이 치뤄지는 11월15일 목요일,

'2018대학입시거부선언'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 <멈춘자들의행진>을 개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투명가방끈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8.hiddenbag.net




댓글 로드 중…

트랙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URL을 배껴둬서 트랙백을 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