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충)'은 청소년혐오 표현이다

2018. 9. 20. 20:24칼럼-청소년의 눈으로

‘급식(충)’은 청소년혐오 표현이다


- 삽화: 다루

인터넷을 하다 보면 청소년을 ‘급식(충)’으로 부르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청소년을 ‘급식’으로 부르는 것이 만연하면서, 언론에서는 작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한 때 학생들이 외교 행사에 동원된 것을 가리켜 ‘급식 외교’라 칭하기도 했다. ‘급식’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다는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성을 집어내 만든 말로, ‘학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회에서 학생과 청소년을 구분 없이 부르는 것처럼, ‘급식’ 또한 학생인 청소년과 비학생 청소년을 통칭한다. 청소년이 사용하는 은어를 ‘급식체’라고 부르고, 청소년 팬들을 ‘급식팬’이라 부르는 등 활용 범위도 넓다. 그러나 ‘급식’이라는 단어는 청소년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소위 ‘급식충’의 특성을 정리했다는 온라인 사이트들에 의하면, ‘급식충’이란 ‘일부 민폐를 끼치는 미성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급식충’들은 무책임하고, 상대방에게 무례하며, 논리적이지 못하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사실이라고 우긴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또,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비판 없이 따라하고, 공부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설명된 곳도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사실상 청소년 전반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식’이라는 표현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청소년을 일컫는 재치 있는 표현인 것마냥 쓰이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바탕으로 신상을 알 수 없는 온라인 이용자가 미성숙한 행위를 보이면 그 이용자가 청소년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일도 잦다. ‘청소년이다(=급식(충)이다)’는 그 자체로 모욕적인 표현이 된다.

‘급식(충)’의 어원을 찾아서

그렇다면 ‘급식(충)’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먼저,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많은 혐오 표현들이 음식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예컨대 여성을 일컫는 혐오 표현으로 ‘김치녀’, ‘된장녀’가 있다. 중국인이나 화교를 ‘짱깨’라고 부르는 일도 있는데, ‘짱깨’는 ‘짜장면’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 널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호남지역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바탕으로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혐오 표현이 유독 음식과 관련 있는 이유는 혐오라는 개념이 소수자에 대한 멸시, 역겨움, 거부감과 같은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는 특성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음식은 후각, 미각, 청각 등과 같은 감각을 자극하며, 특히 소수자를 칭하는 음식 대부분이 김치나 홍어와 같이 자극적인 음식이라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급식’이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 – 소란스럽다, 지저분하다, 값이 싸다, 질이 낮다


이러한 관점에서, 급식(충)이라는 표현이 급식이 가지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지 고찰해 보았다. 특정한 음식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지만, 급식에는 시각적으로 떠오르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다. 모두가 일괄적으로 배식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밥을 먹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쉽게 지저분해지는 모습이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식판은 보통 값이 싼 철로 된 식판이며, 국그릇이 따로 없는 경우 흘리기도 쉽다. 사용하는 식기뿐 아니라 급식에 사용되는 식재료나 식사의 질이 낮다는 인식 또한 만연한데, 이는 마냥 편견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불량 급식’ 사건은 끊임없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2006년에는 비위생적인 급식으로 인해 전국의 37개 학교에서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식중독에 걸려 급식이 한동안 중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감사를 진행한 결과, 비위생적인 식자재를 거래한 것으로 적발된 급식 업체는 53곳이나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학교 급식에 대한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추락했다.

급식에 대한 결정 권한이 없는 학생들 - 순응과 굴욕에 익숙한 존재

그러나 급식의 근본적인 문제는 질이 낮은 식사가 배식되어도 학생들이 거부할 수 없고, 무조건 주어진 대로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식단이 하나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선택의 기회조차 없다.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하거나 특정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해도 급식을 먹어야 하는 한 그러한 식이요법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잔반을 남기지 말라고 강요하며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지 않을 자유를 억압하기도 한다. 많은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순서와 자리까지 지정하는 경우가 많고, 급식 외에 다른 방법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도 한다.

이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청소년의 처지와 관련이 있다. 학교 관리자들이 결정한 것에 항상 무조건 따라야 하는 청소년은 굴욕과 순응에 익숙해진다. 급식(충)에는 우리 사회에서 굴욕과 순응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의 처지를 비하하는 맥락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급식에 열광하는 학생’에 대한 희화화

한편, 급식을 먹는 학생들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급식의 질이 낮고, 급식에 대한 학생들의 결정권이 없는 것과 별개로 ‘모든 학생들은 급식에 (비이성적으로) 열광한다.’는 이미지이다. 학생을 소재로 하는 콘텐츠에서 급식 시간 직전의 수업이 끝날 때의 모습을 ‘개판 5분전’이라고 묘사하며 희화화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학생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급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자마자 급식실로 다 같이 뛰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에서 학생들은 먹을 것 앞에서 이성을 잃는 것처럼 표현된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급식 시간을 기다리는 이유는 단지 ‘먹는 걸 제일 좋아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학교 안에서 과중한 학습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가운데, 음식을 먹는 것은 유일한 해소법일 수 있다. 한 시간쯤 되는 급식 시간은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 중에 여유를 가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많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청소년의 경우, 이러한 특성이 과장되거나 모든 학생들의 보편적인 특성처럼 일반화된다. 이러한 인식에는 먹을 것만 주면 모든 욕구나 불만이 해결될 만큼 청소년들이 단순하고 미성숙하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혐오는 ‘급식(충)’이라는 말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무상급식 관련 논쟁 – 청소년은 복지의 수혜자다

‘급식충’의 어원에 대한 또 다른 추측으로는 무상급식에 대한 것이 있다. 2010년 무상급식에 대한 논쟁은 청소년이 복지의 수혜자라는 점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2009년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건 이후 무상급식은 2010년 6월 지방선거의 최대 쟁점이 됐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보수 언론들은 무상급식을 ‘포퓰리즘’, ‘선심성 복지 정책’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는데, 그러한 언론전 속에서 무상급식의 대상이었던 청소년은 자연스럽게 ‘선심성 복지의 수혜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청소년은 ‘청소년 요금 할인’과 같은 복지 혜택을 받는 것에 대해서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혜택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무상급식 논쟁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소년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는 이미지가 부각되었고, 그것이 급식(충)이라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급식(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젊은 세대 청소년과 비청소년을 구분하려는 논리

여기서 우리는 ‘급식(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세대가 주로 20-30대라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급식(충)’은 신조어다. 청소년에서 벗어난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20-30대들이 왜 오히려 급식(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청소년을 비하할까?

오히려 그들이 청소년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의도적으로 청소년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급식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그들이 더 이상 ‘급식충’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자리 잡고 있다. 청소년이라는 집단에 대한 사회적인 혐오와 차별이 만연할수록, 그 집단에서 벗어났다는 상징은 사회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20대의 경우 10대 후반의 청소년과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과 청소년을 구분 짓고자 하고, 그들을 더욱 혐오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급식(충)’이 어떻게 청소년혐오 표현이 되는지, 청소년을 혐오하는 표현으로 왜 ‘급식’이라는 단어가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이런 저런 추측들을 짚어 보았다. 급식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겪는 상황과 더불어 사회에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복지의 수혜자, 단순하고 동물적임-을 반영하는 단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급식(충)이 젊은 세대의 신조어라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의 나이에 따른 기회와 자격의 불평등함을 마주한 젊은 세대들이 그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단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오히려 그들과 청소년을 더 확고하게 구분 지으려고 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약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약자를 더욱 혐오하는 문화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 가치를 위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치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