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와 듣기의 자리

2018. 5. 16. 20:20칼럼-청소년의 눈으로



말하기와 듣기의 자리


 중학생 시절,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들을 너무 싫어했다. 그 친구들을 너무 싫어했던 나머지, 일진‘처럼’ 보이는 애들마저도 다 싫었다. 예컨대 진한 화장을 하거나 교복을 줄인 애들, 담배를 피운다고 소문난 아이들, 불량한 선배들과 쉬는 시간마다 밀담을 나누는 아이들. 그런 애들이 꼴 보기 싫었다. 본인의 비행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못마땅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에서 일진들에게 많이 덤볐다. 정당한 이유야 항상 있었다. 일진으로서의 권위를 악용해서 매점에서 새치기를 했기 때문에, 소극적인 성격의 아이들을 큰 소리로 비웃었기 때문에, ‘공부밖에 모르는 애’라는 식으로 나를 무시했기 때문에……. 혼자서도 덤볐고 떼거지로도 덤볐다. 남자애들한테도 덤볐고 선배들한테도 덤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겁 없는 정의로움의 참담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다. 옆 학교 일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언니의 뺨을 때린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같은 일이 일어나면 또 덤빌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힘들었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학교 측의 엄벌을 바랐다. 선생님들이라면, 처벌의 권한을 가진 그분들이라면, 내가 입은 상처에 걸맞은 폭력을 가해자들에게 대신 행사해도 좋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진 처분은 교내봉사 같은 가벼운 징계가 전부였다. 놀랍게도, 그게 끝이었다. 어떠한 대화나 조정도 없었다. 차라리 선생님들이 가해자를 이해해 보라고 윽박을 지르는 편이 따스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건은 끝이 났고, 누구도 나에게 뭔가를 묻지 않았다. 가해자도 학교를 잘 다녔다. 여전히 일진 친구들과 어울린 채였다.

 

 나는 몹시 분했다. 선생님이 피해자인 나를 더 보살펴 주지 않고 이전처럼 하는 것도, 가해자인 아이들에게 여전히 잘해 주는 것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어린 애의 유치한 어리광’이라고 단순히 말해 버릴 수도 있겠으나, 그 분함이라는 건 나에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폭력에의 경험을 넘치게 위로받고 싶은 욕구, 엉뚱한 복수심으로 괜한 일을 벌인 것에 대한 후회, 나를 보살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원망까지가 모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속에 복잡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도, 소화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그저 누가 저 아이들을 혼내 줬으면, 나 대신에 그렇게 해 줬으면 하며 오랫동안 이를 갈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학교는 냉정하고 무관심했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분함의 원인이 ‘솜방망이 처벌’에 있다고 생각했다. 혼쭐이 나는 그 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학교폭력의 사례에 있어서만은 남몰래 체벌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바랐던 것은 처벌 자체라기보다는 공감과 위로였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 측이 나에게 공감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길 바랐다. 너의 슬픔, 상처, 두려움에 우리가 공감한다고, 너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것을 체벌이 보여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의 분노에 공감한다면 응당 그들을 혼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타나 기합이라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체벌은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까지를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나를 소외시켰던 기계적인 처벌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가 생생함을 잃지 않고 전달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에 가깝다. 체벌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피해자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벌은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자리를 뺏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미처 토로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이 교사의 체벌 이후에는 ‘충분히 해결됐다’고 일단락되는 것이 그러하다. 학교는 피해 학생의 분노와 슬픔을 폭력으로 승화할 것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일지언정 충분히 이야기되고 들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말하기와 듣기의 자리가 마련된 후에야,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당사자로서 사건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분노와 상처를 직접 이야기하고, 피해에 대한 지원과 합당한 보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해자 또한 단순한 처벌을 넘어 폭력의 본질적인 문제 자체를 통감할 수 있도록 문제 해결 과정에서 적합한 도움과 교육을 받고, 마침내는 반성과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말하기와 듣기는 단순 처벌을 통해 사건을 빠르게만 청산하려는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해결 주체로서의 피해자’, 악마 같은 가해자가 아닌 ‘변화해 나갈 가해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체벌만으로는 완수 불가능한 세심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체벌을 받는 가해자들을 상상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나의 아픔을 위로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들로 과거를 보듬을 수 있다는 알게 됐다. 대신 이런 생각들을 한다. 학교가 체벌을 정당화하는 데 피해 학생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학생들이 학교폭력이라는 경험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공감과 소통을 통해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체벌이라는 또 다른 폭력이 정당화되는 모습을 교육 현장에서 목격하지 않기를 바란다.


- 이재모(철학과 학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