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아랫사람이라는 각인

2017.11.26 22:24 - 요즘것들 아수나로



아랫사람이라는 각인


 중학교에 입학하니 당황스러웠다. 명찰 색깔로 학년을 눈에 보이게 나눈다고 하길래 처음엔 그냥 신기한 방식 정도로 느꼈는데, 위 학년이면 아래 학년이 먼저 고개와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위 학년에게는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라고도 했다. 학생회 간부가 공식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다른 초등학교에선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선 그런 식의 요구를 하지는 않았었다. 존댓말을 하는지 반말을 하는지는 각자가 관계에 따라 알아서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니까 교복과 명찰로 학년을 구분하고 위 학년에게 먼저 허리를 숙이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고, 교사들도 그러라고 이야기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폭력과 강압이 더해졌다. 고학년 학생회 간부들은 점심시간에 반을 돌거나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자습실에 와서는 ‘요즘 선배들한테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싸가지가 없다’는 트집을 잡으며 기합을 주고 군기를 잡곤 했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남학생만 있어서 더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학교에서 말하는 선후배 간의 예의,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 적은 사람 사이의 예의란 무엇일까. 서로 얼굴도 모르고 말 한 번 섞어 본 적 없는 사이여도 마주쳤을 때 재빨리 명찰 색깔을 살펴 ‘선배’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받들어 주는 것이 예의인가. 좀 더 먼저 태어났고 학교에 먼저 입학했으면 나의 ‘윗사람’인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요구받는 그런 행동들은 예의라기보다는 ‘규칙’, 또는 상하관계를 보이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해야 옳지 않나 싶다. 내가 ‘아랫사람’임을 확인하는 의식. 그 때문에 한동안은 교정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명찰을 일일이 훑어보느라 긴장하고 다녔다.



윗사람의 체면이란


 청소년과 나이 많은 어른 사이의 벽은 물론 그 이상으로 더 견고했다. 학생과 교사 사이라는 점을 덧붙이면 더했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부 교사가 두발 단속을 하는데 학교의 두발 규정과 다르게 자기의 잣대로 더 빡빡하게 학생들에게 벌점을 주는 일이 있었다. 공지된 규정과 다르다고 내가 항의를 하자 그는 나에게도 벌점을 주었다. 내가 그 교사와 언쟁을 벌인 것 때문에 나는 담임에게도 불려갔다.


 담임은 중재를 하려고 한다면서 그 교사의 조치가 정당했는지 여부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핵심은 ‘다른 학생들 앞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 선생님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잘 말했으면 모르겠는데 정면에서 지적을 한 건 예의가 없는 일이었으니, 나 보고 먼저 사과를 하라고 했다. 담임을 비롯한 교사들의 설득과 압박에 나는 결국 먼저 사과를 하러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은 많았다. 내가 교사들에게 뭔가 의견을 말하거나 항변을 하면, 그건 곧 교사의 체면을 깎는 무례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잘잘못을 따져야 할 원래의 문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의 태도나 문제제기 방식, 교사의 체면과 기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부상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사들에게 중요한 것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랫사람’으로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들의 ‘윗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숙이고 들어갈 때마다 내가 그들의 아랫사람임을 확인하며 굴욕을 느끼곤 했다.


 청소년이 경험하는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이처럼 자신들이 아랫사람임을 각인당하고 굴욕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나이주의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을 바로잡기보다도 윗사람의 체면과 기분을 고려하는 것을 먼저 배우게 된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위계적이고, 비리가 용인되고, 신뢰가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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