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신문 요즘것들

비청소년 연대는 어떻게 청소년을 소외시키는가

2017.11.09 20:42 - 요즘것들 아수나로

청소년 연대는 어떻게 청소년을 소외시키는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보통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끼치는 이들을 마주하면 그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 말을 걸거나 쪽지에 메시지를 적어 건네는 등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소위 ‘맘충’ 논란에서 사람들은 아동의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의 ‘엄마’를 비난한다. 아동을 이런 곳에 데려온 ‘엄마’가, 아동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엄마’가 비난의 화살을 맞는다. 보통 그런 지적을 받은 여성은 그 자리에서 아동의 행동을 나무라고 저지한다. 결과적으로 아동은 주위 사람의 불편함이 아니라 ‘엄마’의 꾸중만 신경 쓰면 된다. 분명 아동 또한 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데, 아동은 ‘엄마’와만 의사소통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한동안 ‘기발한 아동 학대 예방 광고’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떠돌았던 광고가 있다. 스페인의 아동 청소년 지원 단체 Anar Foundation에서 낸 이 옥외 광고는 비청소년의 평균 시야에서는 평범한 아동의 얼굴 사진이 보이지만, 비청소년에 비해 키가 더 작은 아동의 시야에서는 아동의 얼굴에 상처가 나 있는 사진과 함께 “만약 누군가 당신을 다치게 한다면, 우리에게 전화하세요. 도와줄게요.”라는 문구가 보이게 만들어졌다. 이 옥외 광고의 핵심은 아동 학대 구제가 필요한 아동 당사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엄마의 마음으로 신고하세요.’,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입니다.’와 같이 부모를 타겟으로 아동 학대 신고 캠페인 광고를 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례에서 확연하게 나타나는 차이는 아동·청소년을 소통의 상대로 여기는가이다. 스페인 아동 청소년 지원 단체의 아동 학대 신고 캠페인 광고는 아동에게 직접 말을 건다. 아동이 스스로 신고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아동의 눈에만 읽히는 사진 기술과 문구를 사용한다. 반면, ‘맘충’에 대한 비난은, 그 비난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와 상관없이, 보호자인 ‘엄마’를 대화의 상대로 둔다. 이 캠페인 광고에서 아동은 직접 신고를 하는 주체이지만 한국의 ‘맘충’ 논란에서 아동은 보호자의 관리 대상일 뿐이다. 즉, 아동은 비판이나 협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온전한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하는 청소년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동의를 구하거나 합의할 때, 설득할 때, 비판할 때 서로 대화를 나눈다. 칭찬을 하기 위해 먹을 것을 던져주고, 지적을 하기 위해 매를 드는 건 상대를 이성적인 대화의 상대라고 인식하지 않을 때의 행동이다. 청소년이 스스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비청소년이 자신을 온전한 한 개인으로서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고 느낄 때다. 단순히 ‘맘충’ 논란에서뿐 아니라 많은 상황 속에서 청소년은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청소년끼리의 대화로 인해 소외되곤 한다.


 은행에 갔던 청소년 A씨는 분명 자신의 통장을 개설하러 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행 직원이 부모를 상대로만 금융 상품에 대한 정보를 안내했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A씨는 “상투적인 안내 멘트였음에도 분명 직원은 아빠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같이 있었지만 직원은 시종일관 아빠의 눈만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말 앞에 붙이는 호칭 또한 ‘아버님’이었다.”고 말했다. 고객과 직원이라는 관계에서조차 아동·청소년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객인 부모 뒤에서 옷자락만 붙잡고 있는 존재로 머무른다.


 또 다른 사례로, 부모와 함께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던 청소년 B씨는 “내 증상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인데, 내 증상을 내가 이야기하지 못하고 같이 있던 부모가 의사에게 설명했다. 의사는 내 증상에 대한 처방을 부모를 상대로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청소년 자녀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부모가 청소년 자녀를 대리하는 경우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학교에서는 방과후 학습을 하거나 현장학습을 가는 것 등 청소년의 거의 모든 행위가 부모와 교사의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습은 청소년이 사회적 주체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하고,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은 비청소년과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지만, 대상화된 역할로서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비청소년의 일방적인 훈계와 충고를 수용해야 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부모와의 대화를 꺼리는 청소년 C씨는 “아빠와 대화하다 보면 결국 모든 이야기가 아빠의 훈계로 끝난다.”고 말했다. 이 사회에서 정의하는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또는 ‘보호받는 사람과 보호하는 사람’으로 정형화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청소년이 조언을 요청하지 않았다 해도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비청소년의 일방적인 훈계로 이어진다. 따라서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에 평등과 존중을 전제로 하는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좋은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흔치 않다.



세상의 주도권을 쥐는 비청소년 연대 - “애들은 가라”


 청소년의 집단적인 특성은 사회적으로 유난히 강조되는 편이다. 또래 집단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경향성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특성’의 항목으로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학교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삶의 오랜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제약받는다. 때문에 서로 유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단적인 특성을 띠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청소년이 주도하는 사회는 예컨대 청소년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를 사용한다는 점 등을 들어 청소년의 집단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비청소년 집단과 구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사회적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청소년과의 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쥐려 하는 ‘비청소년 연대’가 청소년에 대한 배제와 타자화를 기반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비청소년 연대는 그들만의 대화를 매개로 촘촘해진다.



청소년을 대상화하고, 밀어내는 비청소년 연대


 신문이나 잡지에는 종종 ‘중2병에 걸린 우리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와 같은 글이 실린다. 비청소년 독자들의 보이지 않는 질문에 대답하듯 쓰인 비청소년 전문가들의 글이다. 많은 비청소년 모임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자식 키우는 얘기’가 사회적으로 권위를 가진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청소년은 ‘철부지, 등골브레이커, 중2병 환자’가 된다. 오로지 그들의 시선에 의해 가공되어, 어디서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대화 소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청소년을 배제하는 비청소년 연대의 특성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동안 PC방에서는 오버워치나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이 나이 제한이 있는 게임을 하는 초등학생 나이의 이용자들이 신고당해 PC방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어느 이용자가 ‘온갖 비속어를 써대며 못된 것만 배우는’ 초등학생들을 ‘어른으로서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있었고, 그 후 경찰은 직접 출동해서 초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이용자는 초등학생들이 경찰에게 붙잡힌 후 울던 모습을 통쾌하다는 듯이 묘사했고, 그러한 신고를 한 것이 ‘보람차다’고 글을 남겼다. 이 게시물은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평소 ‘시끄럽고, 욕을 빽빽 하며 게임에서도 매너를 지키지 않는’ 초등학생 PC방 이용자들을 몰아낸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곧이어 다른 PC방에서도 초등학생 이용자들을 신고하는 사건이 늘었다.


 이는 ‘15세’, ‘19세’와 같은 오락 콘텐츠의 나이 제한이 그 콘텐츠 내용의 적절성과 상관없이 특정 나이 때의 사람들을 오락 사회에서 배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경찰에게 붙잡혀 굴욕당하는 청소년을 묘사하며 비웃거나 통쾌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모인 집단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러한 사건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전시함으로써 집단 내에서 동조를 얻고, 자신은 약자의 위치에 처해 있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가해자 집단으로서의 비청소년 연대


 위의 사례는 비청소년 연대가 언제든 자신이 가진 힘과 권위로 청소년을 억압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실제로 부모나 교사에 의한 가정폭력, 학교폭력은 비청소년 간의 공모를 통해 그 심각성이 축소되거나 지워지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에 대한 비청소년의 폭력이 이토록 쉽게 용인되는 이유는 사건을 다루는 형사 체계-법조인, 경찰 등-가 이미 비청소년만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청소년을 제어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폭력이 필요하다’는 이해관계가 비청소년 연대 안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폭력을 당하고 대안으로 가족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 D씨는 “나 빼고 부모와 상담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부모는 상담가 앞에서 나를 왜 때렸는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고, 중년의 상담가는 부모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그들의 대화 속에 나는 빠져있었고, 부모는 그 속에서 ‘가족의 불화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훌륭한 부모’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사회는 청소년 자녀를 때린 부모에 대해서 자녀의 입장보다는 ‘청소년 자녀가 비뚤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부모의 감정을 더 이해하고 공감한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폭력에 대해서도 학생의 입장보다는 ‘많은 학생들을 한 번에 관리하느라 힘든’ 교사의 입장을 더 적극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청소년 연대는 가해자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스스로 더 큰 가해자 집단을 형성해간다. 서로에 대한 암묵적인 이해와 공감을 전제로 한 비청소년끼리의 사건 처리 과정 속에서, 청소년은 자신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받는 경험을 하기 어렵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상상하기


 사회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동등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가장 기초적인 증거는 그들이 일대일로 맺고 있는 관계에서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에서 여전히 청소년은 ‘낮은 사람’, 비청소년은 ‘높은 사람’이다. 청소년을 낮은 사람으로 보는 태도는 청소년을 온전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 청소년을 훈육과 관리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때 투명하게 드러난다. 19세라는 선을 기준으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비청소년 연대는 청소년이 ‘낮은 사람’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사회의 자원과 권력을 독점한다. 오로지 청소년을 배제하고 위협하기 위해 존재하는 비청소년의 연대를 허물면,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에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 치이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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