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지르며 하는 침묵

2017. 8. 10. 21:01틴스페미니즘


 교육부가 2015년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은 ‘여자는 무드에,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등 왜곡된 성인식과 잘못된 성폭력 대처법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에 교육부와 여성가족부는 8월 중으로 성교육 표준안을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울시 위례별초등학교에서는 방과후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한 교사가 온갖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 학교 안에서의 성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이에 대해 학생과 교사가 자신이 경험하거나 진행했던 성교육의 문제점과 어려움에 대해 쓴 기고글 4편을 연재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진행한 <청소년이 말하는 성교육 수다회> 기록을 통해 청소년이 진단하는 왜곡된 성교육의 폐해와 청소년이 진짜 원하고 필요로 하는 성교육은 어떤 것인지 제시한다.



소리를 지르며 하는 침묵



 

 내가 다니는 학교는 여중이다. 학교에서 작년 겨울에 성교육을 진행했다. 학교에서 성교육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은 대부분 외부 강사가 진행한다. 그 강사는 미혼모 보호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미혼모들이 어려운 여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 교육을 받기 어려운 점, 의료 기관에 찾아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 생활비를 벌기 힘든 현실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이를 해결하려면 사회의 편견과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강사는 우리에게 그러니까 '사고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왜? 왜 그렇지? 청소년의 성을 억압하는 것이 현재 존재하는 미혼모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청소년 미혼모가 겪는 차별은 진정 어디에서 왔는가? 그날은 많은 것이 화나고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수업 중 강사가 순결을 강조하는 것을 잠자코 들어야만 했다. 그는 곧 낙태 이야기를 꺼내더니 영상을 보여주었다. 인터넷에서 본 것만 같은, 낙태 과정에서 태아는 살려고 도망친다는 말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날 즈음에는 이런 문구가 나왔다. “낙태는 살인이다.” 학생들은 일어나서 그 문구를 세 번 따라해야 했다. ‘순결 서약종이에 서명을 하고, 또 다시 책임지지 못할 임신을 한다고 해도 낙태는 없어야 한다. 꼭 아이 낳아라.’ 같은 말을 들었다. ‘여성들은 자기 자신까지 포기하면서 원치 않는 출산을 해야 하는구나.’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와 매일 얼굴을 보는 미혼모에게도 이 문구를 따라하게 할 수 있을까?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또 우리에게도 말해도 되는 걸까? 그 순간 수업을 듣는 학생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원치 않은 임신에 있어서도 여성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여성에게만 책임을 부여한다.


 나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이런 식의 성교육에 대해 항의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외부 강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너희가 이해하라는 말이었다. 그날 그 성교육 강사에게 화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혔던 것이 후회스럽다.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알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서웠다. 다른 학생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에게 항의하면 교실의 규칙을 배반하는 게 될 것 같았다. 지금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이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후회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곳에서 어떻게 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교육 참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를 배제하면서 진행되는 성교육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성을 항상 참는 쪽, 책임지는 쪽으로 만들려는 성교육은 여성청소년의 자존감을 잃게 만든다.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만 할까?


 ― 이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