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필요 없다 언니도 필요 없다 - ‘언니’, ‘자매애’ 속 나이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어서

2017. 4. 25. 22:36Yosm Special


디자인 : 정다루


 199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소위 ‘진보’라 일컬어지는 운동사회 내의 가부장제를 지적하며 “오빠는 필요 없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런 문제제기와 투쟁에 힘입어 운동사회 안에서는 꾸준히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성, 성차별, 성폭력, 여성혐오 등에 대한 경계 기반이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오빠’에 담긴 젠더위계에 비해 나이위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다. 2017년인 지금 여전히 곳곳에서 보이는 ‘언니’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준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활동가 모임인 ‘불꽃페미액션’에서는 지난 2월 말 〈언니들의 성교육〉이라는 이름의 대학교 신입생 대상 강연을 기획해 홍보했다. 홍보물에는 “연령과 관계없이 상호존중하는 친밀한 여성참가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언니’를 사용하였습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곧 해당 홍보 게시글에는 나이주의적 용어 사용에 문제제기하는 댓글이 달렸다. 불꽃페미액션은 ‘언니’라는 표현이 친밀한 여성들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연령과 상관없이 여성들의 연대와 자매애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일차적으로 해명했지만, ‘언니’라는 표현이 수직적 나이위계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어떤 논리로 부정할 수 있느냐는 추가적인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얼마 뒤 불꽃페미액션은 문제제기에 동의하며 행사의 이름을 〈페미들의 성교육〉으로 변경하고 입장문을 발표했다. 


 ‘언니’라는 표현은 여성이 보기에 멋있거나 롤 모델이 되는 여성 혹은 역사 속의 여성 위인을 일컬을 때 쓰이기도 한다. 〈언니들의 성교육〉 역시 이러한 맥락을 활용하고자 한 혐의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발화자에 비해 나이가 많든 적든 그들은 ‘언니’로 불린다. 이는 ‘멋있음’이나 ‘앞서감’, ‘참조점이 됨’과 같은 요소가 나이 많은 존재가 갖는 특성으로 여겨지기에 성립되는 나이주의적 표현이다. 이러한 특성을 나이 많은 존재의 특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 사회 곳곳에 녹아있는 나이위계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나이주의적 인식을 강화한다. 나이위계에 기대지 않고서는 그들을 추켜세울 수 없는 것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매애’가 갖는 한계


 해당 홍보 게시글에 처음으로 문제제기하는 댓글을 쓴 진냥 씨는 ‘왜 꼭 언니들이 가르쳐주어야 하는 건가’, ‘언니가 수직적 의미가 아니라는 해석은 누구의 입장인지 동의하기 힘들다. 언니가 자매애의 상징이긴 하지만, 그것이 동등한 자매애였던가?’라며 ‘언니’라는 표현과 ‘자매(애)’로 표현되는 여성 간의 연대가 평등한 관계 맺기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짚어냈다.


 ‘자매애’라는 표현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으로 여성의 연대를 가리거나 왜곡하는 사회적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남성의 연대를 나타내는 ‘형제애’라는 표현과 같은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표현들은 성별이분법에 기반을 두기에 갖는―여성과 남성 이외의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존재의 연대를 포괄하지 못하는―한계에 더해 ‘나이를 기반으로, 수직적 위계를 전제하여, 가족이라는 범주로 엮는’ 표현으로서도 한계를 갖는다.


 진냥 씨는 “‘언니’라는 말이 자매애의 상징이라는 데엔 동의해요. 자매는 평등하지 않은 연대체이니 어쩌면 가장 완벽하게 ‘언니’라는 호칭으로 상징될 수 있죠. 과거에는 그런 연대로도 만족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언니 페미니즘‘이 절 해방해주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알겠어요.”라고 밝히며, 이 사회가 평등한 관계 맺기를 고민하지 않고 상대방을 ‘언니’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방식의 관계맺음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친근함과 연대의 표현이 꼭 언니, 오빠, 형, 이모 등의 ’가족‘의 호명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며 그걸 넘어서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가 하는 분노와 갑갑함이 크다고 말했다.



평등해야 안전하다


 친근함과 연대를 드러내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언니, 오빠, 형, 이모 등 ‘가족’으로의 호칭은 우리 사회가 평등한 관계 맺기를 고민하기보다도 나이위계와 가족이라는 틀에 익숙해 왔음을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틀이 친근하고 안전하다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굳건하다. 그러나 요즘것들 13호 〈‘평범한 가족’은 없다>의 글들이 증언하듯 가족 역시도 철저히 나이나 젠더위계를 기반으로 해 누군가에겐 한없이 안락하고 안전하지만 누군가에겐 가장 억압적이고 위험한 관계가 된다. 


 누군가를 나이위계와 가족이라는 틀에 기반을 둔 ‘언니, 오빠, 형, 이모’ 따위의 호칭으로 불러야 자신이 친근하고 안전한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렇게 불러야 동시에 자신도 안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허구적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열렸던 한 토론회의 이름은 〈평등해야 안전하다〉였다. ‘오빠’의 젠더 위계를 부수는 것만으로는 안전하지 못하다. ‘언니’ 역시도 부숴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위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거나 가족이라는 틀 안에 속한다는 이유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언니, 오빠, 형, 이모’가 아니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친밀하고 안전한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될 수 있을 것이다. 위계가 없는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친근함과 안전함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이 없는 셈 치거나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말자. 그 누구와도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고민을 이어나가자.


[호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