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청소년이었던 나의 임신과 임신중단 이야기 - 나를 지킬 권리가 필요해!

2016. 10. 15. 11:32틴스페미니즘


불안하지 않게, 안전하게, 나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숨길 필요 없이 

내 이름으로 적합한 처치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해요.”

 


'여성의 몸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낙태를 비도덕 의료행위로 규정하는 입법 철회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기자회견 

(제공 :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페이지)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터뷰와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지난 103, 폴란드에서는 정부와 집권 정당이 추진하는 '전면적 낙태금지법'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다. 집회 참여자들은 생식권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검은 옷을 입고 파업을 벌이며 강력하게 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폴란드 총리는 개정안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으며, 해당 법안은 지난 6일 폴란드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한국 또한 몇몇 예외상황을 제외하고는 임신중절수술이 불법인 국가이며, 낙태죄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청소년의 임신과 임신중단은 이중 삼중의 억압을 받아 더욱 어렵고 이야기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 인터뷰에서는 그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아 전한다.

 

 

호야 (이하 호) :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라일락 (이하 라) : 안녕하세요. 저는 라일락이고 지금은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단체 상근, 나머지 3일은 활동보조 일을 하고 있어요. 주말에도 회의가 많아서 월화수목 금금금처럼 살고 있네요.

 

 

호 : 언제, 어떻게 임신을 하게 되었나요?

라 : 임신 시점은 2014년 말~15년 초였고 저는 당시 18, 만으로는 16에서 17세로 넘어가는 나이였어요. 당시 파트너와는 애인 사이. 그때가 연애를 한 지 4달 정도 되었을 때예요. 그 사람과는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성관계를 맺었어요. 스킨십도 빠르게 했고요. 저한텐 누군가를 진지하게 (애인 관계로) 만나는 게 그때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불붙은 것 같은 연애를 했어요.

  그런데 당시에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었고, 실질적이고 충분한 성지식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피임에 관해서도 콘돔이 존재한다정도로 알고 있었고, 임신이 쉽게 된다는 것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었어요. 파트너는 콘돔을 꼭 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성관계를 갖게 되면서 콘돔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쭉 사용하다가 성관계를 갖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부터 콘돔은 사용하지 않고 제가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호 : 왜요?

라 : 콘돔이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파트너가 저한테 늘 씌워달라고 하고, 씌우고 나서 성기결합을 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제게는 썩 달갑지 않았어요. 고무 느낌이 싫었던 것도 있었고. 그래서 피임약으로 교체했어요.

 


호 : 청소년이라서 피임약을 살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라 : 처음에 피임약 사러 갈 때는 시선이 두려워서 일부러 여자 약사가 있는 약국을 찾아갔고, 일부러 피임약이라고 안 하고 생리 미루는 약 주세요.” 하곤 했어요.

  근데 제가 피임약을 먹은 지 2주쯤 되었을 때 부정출혈이 있었어요. 일단 부작용이라 적혀있기도 하고 피가 나오니까 이게 피임이 되는 건지 불안했어요. 네이버 지식in 정도밖에 의존할 데가 없었는데, 그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니까 거기에 의존하는 것도 불안했고요. 그땐 너무 걱정돼서 집근처에 나이가 지긋한 약사가 있는 약국에 가서 부정출혈이 있다고 하고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여성호르몬 농도가 높아서 처음엔 그럴 수 있다며 다른 약을 주더라고요. 그 약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했는데 당시엔 좀 위축되는 게 있었어요.

 


호 : 어쨌거나 당시에 피임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네요.

라 : 네. 새 약은 부작용도 없고 괜찮았어요. 그리고 이후부턴 약을 먹으니까 다른 피임을 하지 않았었는데, 약을 이틀 정도 빼먹은 적이 있었어요. 그게 화근이었어요. 그 이후에 젖꼭지가 아파서 쎄한 느낌이 들었어요. 임신초기 증상 중 하나라고 들었거든요. 임신이 걱정돼서 청소년 상담센터에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마지막 성관계 후 며칠이(최소 2)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임신테스트기를 썼는데 맨 처음 검사했던 거에선 임신이 아니라고 나왔어요. 근데 혹시나 해서 더 사서 해봤는데 임테기 자체가 불량인 것도 있었고, 희미하게 두 줄이 나온 것도 있었어요. 걱정이 돼서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산부인과는 한 번도 나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내가 성관계 경험이 있다는 걸 얘기해야 한다는 것도 수치스러웠고, 나조차도 내 몸을 잘 보지 못하고 보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하는데 거기 가서 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어야 한다는 게 싫었거든요. 그래서 염증이 있는 것 같을 때에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었고, 내 몸을 방치했어요. 근데 내가 임신을 걱정하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안 갈 수가 없어서 여성 의사가 있는 산부인과를 찾아보게 되었어요.

  찾아보니까 여의사가 진료하는 미혼여성전문 산부인과가 있더라고요. 아예 브랜드가 따로 있어서 곳곳에 지점이 있어요. 그중 한 곳에 갔어요. 질 안에 넣어서 하는 초음파검사를 했는데 아기집이 안 보인다고 했어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피검사를 했고 결과가 1~2주 뒤에 나오는 거였는데, 1주 정도 뒤에 임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자가 왔어요. !

 


호 :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땠어요?

라 : 믿기지가 않았죠. 내 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임신중절)수술을 할 가능성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고요. 너무 막연하니까 병원에 가서 상담했을 때 낳겠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좀 부끄러운 과거이긴 한데 임신중단을 선택지로 두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했어요. 생명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임신중단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그렇다보니 저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호 : 그 소식을 들은 파트너의 반응은 어땠어요?

라 : 과거에 애인이 <자 이제 댄스타임>이라는 영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임신중단을 다룬 영화인데, 영화에도 임신한 여자가 애인인 남자와 어떻게 할지 얘기를 해보자고 하는 장면이 나온대요. 거기서 남자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다고 어떻게 결정할지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는데, 여자가 결정해? 네가 뭐를?” 이렇게 얘기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고 했어요. 의사한테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와서 애인이랑 어쩔지 얘기를 했어요. 애인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절 존중하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만 들으면 괜찮은 말인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 이후에 애인이 한 행동에 대해 그게 존중이었나? 그저 혼자 내버려 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제가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혼자서만 정보를 수집하고 고민해야 했거든요. 수술 당일 얘기를 하자면, 그날 집에서 나오니까 문득 병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애인이 수술하러 가자며 내 팔을 잡아끌었는데, 그 행동이 저에게 불쾌했어요. 나를 정말 존중했다면 내가 병원에 가는데 필요한 정보, , 시간 등을 같이 부담해야 하는 거고, 내가 병원에 가기 싫다고 얘기했을 때 제 기분에 공감해주고 대화를 하는 게 먼저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호 : 임신 당시 당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무엇이었나요? 그것들을 잘 누릴 수 있었나요?

라 : 금전적인 부분이 가장 급했어요. 임신중절 수술은 가격이 천차만별이이고 합법적인 일이 아니니까 보험이 전혀 되지 않아 비싸죠. 임신중절 수술 자체가 합법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에 대한 지원, 보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에게는 특히나 더 많은 지원이 되어야 할 것이고요. 그리고 돈을 내게 되더라도 그것을 파트너가 제대로 분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 경우엔 그러지 못했어요. 전 수술에 80만원이 들었는데 당시 제가 홀로 다 부담했어요

  애인과 이별할 때, 당시 수술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 돈을 내가 다 냈다고. 그랬더니 그는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막 본인 계좌 내역을 직접 확인해보고. 저에게는 큰 돈이었고 당연히 치렀어야 하는 돈이었는데 그걸 기억도 못하고 제 앞에서 확인하는 게 너무 짜증났어요. 그렇게 확인해보더니 그거 주면 돼?” 이런 식으로 얘기해서 제가 울면서 엄청 화를 냈었어요. 그걸 준다고 해서 내 경험과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죠. 그 사람은 돈 생기면 나중에 주겠다고 얘기했지만 그 뒤로는 소식이 없어요.

 

  그리고 병원이나 수술에 대한 정보가 절실했는데, 정확하고 실질적인 정보를 찾기란 쉽지 않았어요. 인터넷으로 주로 찾아야 했고 지식in에 거의 의존했어요. 저 자신도 주변에 얘기하지 않았던 문제도 있지만, 이런 경험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잘 되지 않다보니 주변에서 경험자를 찾기 힘들어서 어렵기도 했어요. 수술을 받았을 때의 경험, 그 이후의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볼 곳도 없고. 혼자서 지식in의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 정보와 함께 끙끙댔던 기억이 있어요. 임신중단 관련한 커뮤니티를 찾을 수도 없었고요. 당시의 나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지금의 제가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텐데. 어떤 병원에 가는 게 좋은지, 수술 방식에는 어떤 게 있는지,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같은 것들. 공감과 지지도 할 수 있겠고요. 당시의 저에게 그런 게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산부인과 얘기를 좀 하자면, 제가 당시에 인터넷으로 찾아서 갔던 미혼여성전문 산부인과는 상업화되어 있어서 의료적인 신뢰는 덜했고, 차갑다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괜찮은 산부인과를 찾았어요. 당시에는 병원에 가는 게 수치스러웠고 병원에 가서는 더 수치스럽게 느끼기도 했어요. 검진을 빠르게 끝내거나 상담하는데 내 말을 경청하지 않는 의사도 많았거든요. 그게 저한테 산부인과에 관한 안 좋은 의식을 많이 남겼어요

  아무래도 산부인과의 문턱이 높다 보니 여성친화적인 산부인과를 리스트화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여성단체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적당히 친절하고 불필요한 참견은 하지 않고, 원하는 질문을 많이 해도 되고 그러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산부인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상업화된 산부인과는 검사 같은 걸 무슨 8종 검사와 같이 세트로 하라고 해요. 불필요한 것도 패키지로 묶여 있어서 한번 검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 편이고요. 그런 곳도 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산부인과가 이렇게 편할 수 있구나 하는 걸 보다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호 : 특별히 청소년/10대여서 헤쳐 나가기 힘들었던 상황이나 차별받았던 경험이 있다면요?

라 : 청소년이어서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임신검사는 청소년이어도 할 수 있는데,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려면 청소년은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에요. 제가 갔던 병원은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는 연령 기준이 만 19세 미만이었는데, 다른 병원은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는 부모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고, 알릴 수도 없었어요. 그들이 나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의 선택을 지지해 줄 거라는 신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보호자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같이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수술할 수 없대요

  결국 저는 처음 검사받은 것과는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했어요. 임신검사 했던 병원은 제 나이를 밝히고 제 이름으로 갔는데, 수술한 병원에는 만 19세였던 친구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갔고요. 남의 명의로 수술을 해야 하는 게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게다가 카운터에 남의 명의로 의료보험을 사용한 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낼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쓰여 있는데, 딱 내 얘기니까 더더욱 마음 졸였어요. 불안하지 않게, 안전하게, 나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숨길 필요 없이 내 이름으로 적합한 처치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해요.

 


호 : 당시에 학교에 다니고 있지는 않았나요?

라 : 저는 당시 탈학교 청소년이었어요. 수술 받을 당시에는 콜센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수술하기 전까지 계속 일을 나갔어요. 금요일인가 수술하고 주말에 쉬고 다음날에 또 바로 일하러 갔었죠. 학교에 다니면서 임신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호 : 임신중단을 결정했을 당시의 심정은 어땠어요?

라 : 일단 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 한 2~3주 지났을 때 수술했어요. 아마 임신 5주차 즈음이었을 거예요. 수술할 때 즈음엔 아기집이 생겼었고. 심장이 제일 먼저 생긴다고 해서 심장소리 들리냐고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의사가 들린다고 얘기한 게 기억에 남아요. 당시에는 그 수정란 혹은 태아에 대해 어떤 죄책감이 느껴지진 않았어요. 새끼손가락보다도 더 작았고, 호흡기관조차 없으니 생명이란 생각이 별로 안 들어서요. 근데 뭔가 애틋한 건 있었어요. 임신중단을 결정하기 전까진 아이를 낳겠다고 해서 태명도 짓긴 했거든요.

   임신이라는 걸 확인해야 수술 상담을 할 수 있어서 수술하던 날에 초음파검사를 하고 상담하면서 수술비용과 방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어요. 계류유산이라고 임신이 되고 아기집도 생겼는데 태아가 없거나 임신초기에 태아가 죽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중절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건 보험이 되는 합법적인 수술인데, 간호사가 계류유산으로 수술한 걸로 기록한다고 설명을 해줬어요.

 


호 : 임신중절 수술에도 여러 방식이 있군요?

라 : 네. 저는 흡입하는 방식으로 수술을 받았어요. 임신중절이 합법인 많은 국가에서는 임신 초기에 약으로 중절이 가능해요. 미페프리스톤(=미페프렉스, 미프진, RU-486)과 미소프로스톨이라는 약을 먹으면 임신중절이 되거든요. 주로 임신 초기에는 제가 받은 것과 같은 흡입술을 하기도 하고. 주사로 분리시켜서 중절하는 방식도 있어요. 전 수술을 하기 싫었어요. 수술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억지로 자궁을 벌리는 게 결코 제 몸에 좋을 것 같지 않잖아요. 그래서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약을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최근에서야 현재 상태에 관한 몇 가지 질문에 답하고 무료로(70~90유로 정도의 기부금을 내고 받는 형식이지만 사정에 따라 무료로도 받을 수 있다.) 그 약을 배송해주는 해외 사이트(https://www.womenonweb.org/)를 알게 되었어요. 한국어도 지원이 되어 있어요.


  처음 제 나이를 밝혔던 병원에서는 주사로 임신중절을 한다고 했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했던 것 때문에 하지 못했어요. 임신중절 수술은 임신 기간이 길어지고 태아가 더 자랄수록 위험해지잖아요. 그래서 얼른 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제가 원하는 수술방식을 택하지 못하고 그저 수술을 해주는 병원을 찾아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선택지를 찾기가 너무 어려워요. 약을 먹는 방식이 가장 간단하고 산모에게 부담스럽지도 않은 건 자명한데. 그 통증도 생리통 정도라고 하고요. 임신중절이 합법인 국가가 너무 부러웠어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임신중절을 할 권리가 정말로 필요해요. 그에 대한 안전성, 통증 등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제공받아야 할 것이고요.

 


호 : 수술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요?

라 : 임신중절에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동의도 필요해서 동의서를 받아요. 저와 같은 경우뿐 아니라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강간, 질병 등)의 임신중절도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고요. 남성 파트너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은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죠.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남성 파트너가 책임을 나누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성 파트너의 동의 없이 수술을 할 수 없는 건 명백히 여성의 선택권/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여하튼 그렇게 파트너 신분증과 본인 신분증을 제출 받아서 복사하고, 자궁경부가 열리는 약을 먹은 후 회복실에 가서 약효 돌 때까지 앉아있게 해요. 이때 애인에게 내 카드 주고 은행에 가서 수술비 80만원 뽑아오라고 했었죠. 그러다가 옷을 갈아입고 수술대에 누워서 마취를 해요. 주사 같은 걸로. 근데 전 긴장해서 그런지 마취가 잘 안 들었어요. 그때 옆에 있는 간호사 손을 잡고 언니 무서워요라고 얘기했던 게 계속 생각나요. 의사가 왔는데도 마취가 안 되었는데 의사가 숨을 깊게 쉬라고 해서 몇 번 쉬었더니 잠에 들었어요

  그리고 깼더니 배가 좀 아팠어요. 제가 원래 생리통이 안 심한데, 생리통보다 좀 더 심하게 아픈 정도였어요. 마취기운도 있고 배도 아프고 하니까 간호사 부축을 받고 회복실로 갔고, 거기에 애인이 있었어요. 거기에 비닐이 씌워진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간호사가 토하고 싶으면 거기다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들었더니 바로 토기가 오고 토했어요.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 서러웠어요. 아까의 무서웠던 것도 생각나고 내가 이런 일을 겪다니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울었어요.

 

  수술 끝나고는 허리도 아팠고 질염 증상도 있었어요. 2~3개월쯤 지나서였는데 그것 때문에 병원에 또 갔어요. 그때도 미혼여성전문 산부인과에 찾아 갔었는데 그때도 애인이 무책임했어요. 그때 일도 그와 헤어진 계기 중 하나예요. 그는 비용을 제가 부담하면 안 되냐고 얘기했었고, 같이 병원 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도 했어요. 아프고 힘들어서 애인에게 연락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위로는 못할망정. 그 이후에는 저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른 적도 있어요

  뉴스 기사 같은 걸 보면 남성들이 자기 애인의 임신중절 사실을 신고하는 경우가 나오는데, 그러면 그 여성이 낙태죄로 처벌받아요. 임신중절이 불법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 사실이 협박용으로 사용되는 이런 현실은 정말 별로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호 : 해당 경험 이후 몸이나 마음, 혹은 인간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나요?

라 : 그 경험을 스스로에 대한 낙인으로 많이 받아들였어요. 나에게 있을 수 없고 상상해 보지도 않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날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애인과 헤어지기 어려웠어요. 이 경험을 같이 나눈 이 사람 외에 누구를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애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불합리한 일들로부터 나를 지킬 수 없었고, 그와 헤어질 수 없었어요. 헤어질 때 저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임신과 임신중단을 하게 된 일련의 상황에서 내가 겪었던 그의 무책임함이나 연애관계에서 있었던 여러 일들 때문에 툭하면 울고 우울증에 시달렸던 때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에 관해서 입을 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시에 친했던 활동가가 제게 연락을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 얘기를 털어놨어요. 그때 새삼스럽게 이 얘기를 말할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꼭 이게 내 흉이 되는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후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그런 사람들에게 보냈던 메시지 내용을 보면 여성으로서 말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이런 식으로 쓰여 있어요. 지금은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어려운 일이었던 거죠. 민우회 같은 여성단체의 친한 활동가들에게도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받았던 공감과 지지, 서로의 경험 나누기 등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됐어요. 좀 더 자유로워졌어요. 그때 그 사람들이 없었으면 조금 더 길을 헤매고 빙 돌아갔을 것 같아요.

  제가 이 경험을 마주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중이에요. 이 인터뷰도 저에게는 그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가깝다고 느끼는 여성인 친구나 활동가에게는 이 경험에 대한 얘기를 어느 정도 예전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는데, 연애하는 혹은 연애할 사람에게는 잘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언젠가는 그것 또한 수월해지리라 믿고, 그걸 말했을 때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면 애초에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아직까진 두려운 게 있거든요. 나에 대한 자책 같은 것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어서요. 더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호 : 지금의 당신에게 임신과 임신중단 경험은 어떤 의미인가요?

라 : 엄청난 값을 치르고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피임, 임신과 임신중단에 대해 미리 충분히 알고 그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야 좋았겠지만, 미리 알지 못했던 게 제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가르쳐줬어야 하는 걸 안 가르쳐주기도 했고, 사회의 편견이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낙인찍게 했던 것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피임을 아무리 잘해도, 성공률 100%인 피임법은 없잖아요. 조심하지 않아서 그랬건, 무지해서 그랬건, 운이 나빠서 그랬건 임신과 임신 중단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때 지지와 공감을 받음으로써 그러한 표현들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나를 낙인찍거나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서서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차별 경험을 좀 더 입 밖으로 낼 수 있게 됐어요. 당장은 어려울 수 있어도 이것 또한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도 얻었고. 전반적으로 내가 갖고 있던 (현재진행형이지만) 성에 대한 편견, 예를 들어 임신중단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이나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연애-관계 방식들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될 수 있었어요.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호 : 앞으로 임신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라 : 성생활을 한다면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일이니까 임신에 대한 가능성은 늘 있다고 생각해요. 임신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직 고민 중이고, 하기 싫기도 했다가 하고 싶어지기도 하죠. 지금은 여러 여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예정에 없던 임신이 되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들,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매뉴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와 파트너를,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호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라 : 나 자신을 더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 인터뷰/정리 : 호야 기자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 이 기사는 청소년신문 요즘것들과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이 공동 기획한 

<틴스페미니즘>의 연재 기사입니다

앞으로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

그리고 임신/출산/임신중절'을 주제로 

더 많은 기사들이 올라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