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 긁적이 산다 - 모두가 제 할 말을 하는 세상

2016. 9. 10. 22:12인터뷰

왜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지


지역에 청소년이 산다 연속 인터뷰 (2) 밀양에 긁적이 산다

요즘것들은 지역의 주민으로서 참여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만났다.

관련기사 : YOSM SPECIAL 지역에 청소년이 산다

제보 : yosmpress@asunaro.or.kr





시위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건줄 알았는데

 

밀루 (이하 밀) :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긁적 (이하 긁) : 제일 처음은 2008, 8살 때 유인물을 본 것이다. 아수나로 처음 출범하고 나온 팜플렛 같은 거였다. 경남에서 지부를 만들까 했다. 하지만 청소년단체는 중학생부터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못했다. [수나로에서는 초등학생도 나이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다 - 편집자 주] 초등학교 졸업할 때 쯤, 밀양 송전탑 활동을 하면서 다시 기억나서 아수나로도 시작하게 되었다.


: 밀양 송전탑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 엄마 따라 간 거다. (웃음) 가족이 거기에 올인 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밀 : 줄곧 밀양 등 투쟁 현장의 사진을 찍어 왔는데, 찍게 된 이유가 있나?


긁 : 밀양 송전탑 투쟁 초반에 사진이 많이 남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결국 남는 건 기록인데,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진을 찍고 있다.


: 인상깊거나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면?

 

: 2008, 밀양에서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활동이 있었다. 집회가 처음 시작된 계기가, 밀성고등학교 여학생 둘이 영남루 계단에서 처음 촛불을 든 일이다. 그 여학생 둘하고 같이 있었던 그 때가 기억에 남는다. 집회나 시위는 우리 엄마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 ‘?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회를 하네?’하고 신기했다. 여하튼 그들 덕분에 청소년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있다.



 △ 2012년,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탈핵희망버스 활동에 참여한 긁적



'보통' 학생들의 불만을 듣도록, 학교를 바꾸다


: 중학교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데, 공약 이행 상황은 어떤가?

 

: 몇가지 학칙을 바꿨다. 원래는 체육복을 입고 하교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샤워시설이 있긴 한데 불편해서 씻고 하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체육수업이 있는 목, 금요일만이라도 체육복 입고 하교하게 해 달라.’고 건의해서 받아들여졌다. 10년 동안 안 고치던 화장실 문 교체도 했다. 두발 완전자유화는 가려면 길이 멀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학생들에게 빚을 덜었다는 느낌에 홀가분했다. ‘표 값을 했다는 생각에.


사실 공약에 하나가 더 있었다. 나는 1학년 때 학생회에 처음 갔는데, 3학년만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선거에 나가서 공약으로 학생회에서 나이주의적 분위기를 없애겠다.’, ‘학생들의 말을 폭넓게 듣겠다고 했다.


임원들에게 학생들을 한 명씩 만나서 불편함을 들으라고 했다. 그 개인들의 불편함 중 공통적인 걸 찾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다가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되니까, 학생회와 학교에 대한 비판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까지는 학생회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해도 무서워서 별 말을 못했다. ‘선배들에게 어디 대드냐면서. 그런데 올해는 달라졌다. 아무래도 비판을 더 많이 받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에서 월별 토의주제를 주면 그것을 두고 학생회임원들이 토의를 하는데, 한 번은 학생의 의무, 어떻게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가 나왔다. 거기에 한 임원이 자율학습을 하자는 의견을 낸 거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칠판에 적었는데, 결정사항이 되었다. 학생들이 별말 안하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학생들이 안 된다, 그걸 왜 하냐고 항의해서 다시 회의를 하고, 문제 조항을 결정에서 뺐다.

 


△ 2014년 청도 삼평리 '반격의 밤' 문화제에서 긁적이 찍은 사진.

경찰이 잠을 자기 위해 논을 갈아엎었는데, 물이 계속 차올라 결국 그 곳에서 잘 수 없었다고. 

포크레인에 짓이겨진 논흙더미 너머로 문화제 현장이 보인다.



왜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지


: 청소년으로서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 “어리니까 빠져라가 가장 많다. 경찰이랑 충돌이 있을 때 가장 많이 듣는다. 다칠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애새끼 데리고 나왔다는 말을 들을까봐. , 경찰들이 연행을 할 때 일단 젊은 사람부터 잡아가고 본다. 잡아가면 남은 활동가들이 고생하니까. 밀양 현장은 희한하게 경찰들이 청소년부터 잡아간다. 밀양 농성장에 청소년활동가가 5명 있었는데 1명이 잡혔고 경찰이 3명을 기를 쓰고 잡으려고 했다.


논의 과정에서도 많이 배제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이주의적인 구호도 많이 쓰였다. “여기는 아이들의 땅인 밀양입니다같은. 아이들만 살아가는 땅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야하는 땅이다. 그리고 모든 싸움은 어른들만 하는 게 아니고, 어린 것들도 한다는 거. 그걸 좀 알아줬으면 한다. 그 구호를 바꾸라면, “여기는 우리들의 땅인 밀양입니다.” 라고 할 것 같다.


어느 현장을 가던 내게 존댓말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청소년활동가를 비롯한 몇몇 인권활동가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날 처음 봤든 몇 번 봤든 반말을 쓰는 게 일상이었고, 언제나 날 가르치려들었다. 나는 밀양 싸움이 시작될 때부터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해왔는데, 몇몇 작가 분들은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건 이렇게 하는 거고 저건 저렇게 하는 거야라며 막 가르치려 했다.


sns 댓글로 네 나이에 겪기엔 세상이 너무 더럽다, 밝은 것만 보고 다녀라’, ‘넌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좁고 미성숙하다. 100권을 읽고 공부를 더해라는 등의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 원치 않은 신체접촉도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문제제기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을 선생이라고 생각했고, 문제제기해서 시끄럽게 만드는 게 싫었다.


가장 화나는 건 나만 겪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폭력과 나이주의적인 폭력을 계속했다. 그런데 가해자들은 운동에 남고,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은 떠나야 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나는 점점 더 내 할 말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왜 똑같이 생각을 하고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지. 화가 나고 억울했다. 어린 여성 활동가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사례를 보고, 국가폭력을 없애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왜 똑같이 폭력을 저지르나 하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다.


 



이게 내 위치에 맞는 일이다


: 청소년의 사회참여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 가장 필요한 것은 쉴 시간을 주는 것이다. 쉴 시간이라는 게, 여가를 즐기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가두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집이나 학교에서 위험하답시고 투쟁 현장에 갈 수 없도록 통제하지 않는 것. 그런 게 청소년의 사회참여를 돕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어른들만이 나서서 바꿔낸 성과가 없다. 비정규직 제도가 98년도에 도입되었다. 이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을 막겠다며 싸웠었다. ‘우리 아이들이 일자리 잃는 것 볼 수 없다며 정리해고 막겠다고 싸웠는데 그 역시 결국 도입됐다. 그런 걸 보면 어른들의 힘만으로는 매우 모자라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데, 나이로 선을 긋는 건 옳지 않다. 싸움에서 승리를 뒤로 내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위치에 맞는 일을 해라이게 제 위치에 맞는 일이다. 비청소년이 되어서 교육청에 들어가고, 국회의원이 된다면, 법을 바꾸려고 해야지 학교를 바꾸려고 해도 할 수 없다. 지금은 학교를 바꾸는 게 내 일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모두가, 누구나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적다고 할 말을 못하고, 여자라고 할 말을 못하고, 누군가와 다르다는 이유로 할 말을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냥 모두가 제 할 말을 할 수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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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루 기자